일러스트=이철원

공공기관 41곳(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중 절반이 넘는 23곳이 ‘CEO(최고경영자) 공백’ 상태다. CEO가 공석이거나 임기가 끝난 곳은 전체의 56%를 웃돈다. 공기업 17개 중 경영 공백 상태인 곳은 70%인 12곳에 이른다. 4월 총선과 지난달 공공기관 경영 평가가 끝나면서 최근 들어 정부가 기관장 물갈이에 나서고 있지만, 서류·면접 심사와 인사 검증, 주주총회 등 기관장 선임 절차를 거치는 데 통상 3~4개월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부터 서둘러도 연말에야 공공기관 전반에 걸친 경영 공백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국전력은 작년 6월 22일 사장 후보자 모집 공고를 내고 선임 절차를 시작했지만, 신임 사장이 취임한 건 석달 뒤인 9월 20일이었다.

특히 총선 등 대형 선거를 전후해 이 같은 공기업 CEO 무더기 공백 사태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커진다. 공기업 CEO 자리가 정치권의 낙천·낙선자를 챙기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민간이 하지 못하는 공익 목적의 일을 대신 하기 위해 만든 공공기관이 정치권의 밥그릇 챙기기에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1년째 공백인 공공기관도 있어

9일 공공기관 경영 정보 공개 시스템 알리오에 따르면 산업부 산하 41개 공공기관 가운데 CEO가 공석인 기관은 8곳, 이미 임기가 끝난 기관장이 임시로 CEO직을 수행하는 곳은 15곳에 이른다.

그래픽=이철원

여기에 25일 나란히 임기가 만료되는 한국석유관리원과 세라믹기술원 등 5곳은 올 하반기면 현 CEO가 물러나야 한다. 사실상 레임덕이 없다고 할 만한 곳은 41곳 중 13곳에 그친다. 지난 문재인 정부가 임기를 1년가량 남겨둔 2021년에 신임 기관장을 대거 선임하며 3년이 지난 올해 공공기관장의 임기 만료가 집중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기관장이 사퇴한 곳도 사정은 비슷하다. 경영 평가에서 해임 건의 조치가 내려진 뒤 지난해 8월 원장이 물러난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은 자리가 빈 지 11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새 원장을 찾지 못했고, 한국에너지재단은 업무추진비를 부적절하게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던 전 이사장이 지난해 9월 물러난 뒤 아직 후임이 정해지지 않았다.

지난 8일 한국남동발전과 서부발전이 사장 공모 절차를 시작하며 5개 발전 공기업 사장 선임은 본격화됐다. 하지만 작년 12월 사장이 사퇴하며 반년 넘게 대행 체제가 이어지는 강원랜드와 지난 5월 사장이 해임된 한국가스기술공사 등 경영 공백 상태인 23곳 중 아직 모집 공고조차 올리지 않은 곳은 11곳에 이른다.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도 힘든 경영 공백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대행이나 임기가 끝난 CEO 입장에서는 큰 그림을 보기 어렵다는 우려가 커진다. 동해 영일만 심해 가스전 개발에 나서는 한국석유공사와 정부는 시추 작업을 연말부터 본격화한다고 했지만, 실무를 사실상 챙길 석유공사 사장의 임기는 이미 지난달 초 끝났다. 수년에 걸친 프로젝트의 밑그림을 그려야 할 책임이 석유공사 사장에게 주어졌지만, 어느 시점에 후임 사장이 취임할지도 지금으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한전의 총부채가 200조원을 넘어서며 재무구조 부실의 직격탄을 맞은 발전 공기업도 사장 5명의 임기가 지난 4월 25일 일제히 끝났다. 석탄발전소 폐쇄와 LNG(액화천연가스) 발전 등으로 에너지 전환, 그에 따른 인력 재배치 등 현안이 산적하지만, 현재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대응책이 나오기 어려운 형편이다.

중소·중견기업들의 수출을 뒷받침하는 코트라도 신임 사장 선임 문제로 어수선하다. 주로 전직 차관 등 산업부 관료 출신이 사장으로 내려오던 이곳은 사장 임기가 끝난 지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 ‘정치권에서 온다’ ‘관료가 온다’ 등 하마평만 무성한 가운데 후임이 지명되지 않고 있다.

◇ 임직원 인사도 미뤄지는 등 후속 부작용도 속출

이 같은 경영 공백의 부작용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기관의 기강은 잡히지 않고, 정책 추진 동력도 생기지 않는다. 한 공공기관장 출신 인사는 “민간 기업보다 공공기관은 훨씬 상명하복 문화가 강하다”며 “대행이나 임기 끝난 사장이 지시해서는 제대로 정책 집행이 안 된다”고 말했다. CEO들이 인사발령에 부담을 느끼다 보니 정기 인사가 지연되면서 직원들 사이에서 불만도 커진다.

한 발전 공기업 직원은 “올 초부터 다음 사장님이 누가 오는지로 뒤숭숭하다”며 “퇴직이나 임금피크, 교육 등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인사도 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부처의 손발 역할을 하는 공공기관장 선임을 조속히 마무리해 정책 추진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수영 서울대 교수는 “오너가 없으면 민간 기업도 사업 추진이 어려운 것과 같이 주인 없는 공공기관은 앞에서 이끌 기관장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며 “적임자를 찾는 과정에 시간이 걸리겠지만, CEO 공백이 더 길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