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양진경

지난 11일 일본 도쿄 유라쿠초에 있는 마루이백화점. 오전 11시 백화점 문이 열리자 여성 고객들이 한국 스포츠 브랜드 ‘안다르(andar)’ 팝업스토어(임시매장)로 몰려들었다. 이날은 안다르가 지난달 24일 시작한 팝업스토어의 마지막 영업일이었다. 회사 관계자는 “팝업스토어 운영 기간 내내 ‘오픈런’이 펼쳐졌다”고 말했다. 안다르 모델인 배우 전지현이 광고에서 입은 티셔츠와 바지는 3일 만에 준비한 물량이 모두 팔려 추가 물량을 들여와야만 했다. 안다르는 팝업스토어를 제외하곤 오프라인 매장 없이 온라인에서만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데 작년 1월 일본에 온라인 스토어를 만든 후 매출이 120억원을 넘어섰다.

한국 소매 기업들이 일본 시장에 진출해 성과를 내고 있다. 일본에는 탄탄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긴 역사를 가진 소매 기업이 즐비하다. 해외 명품 브랜드가 아닌 이상 진입하기 어려웠던 이 시장에 한국 패션·화장품·식품기업 등이 잇따라 진출하고 있는 것이다.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하는 한국 기업들의 제품에 일본 젊은 세대가 호응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끄는 K팝 등 한류 열풍도 일본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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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법인 설립하고, 팝업 여는 韓 기업들

올리브영은 지난 5월 일본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 올리브영이 일본 시장에 본격 진출하기로 결심한 건 그간 성과 때문이다. 올리브영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물건을 팔고 있는데, 일본에서 PB(자체 브랜드) 제품 매출액이 지난 4년 동안 연평균 125% 증가했다. 특히 지난 1분기 한국을 찾은 일본인이 일으킨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285% 증가했다.

화장품과 가정용 미용기기를 제조·판매하는 국내 기업 에이피알은 지난달 온라인몰인 ‘큐텐 재팬’에서 벌인 할인 행사인 ‘메가와리’(대규모 할인)에 참여해 12일 동안 45억원어치를 팔았다. 에이피알 관계자는 “12일 동안 대표 제품인 ‘제로모공패드’가 2만1000개 넘게 판매됐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이 일본에 수출한 화장품은 작년 1~5월 3억2047만달러(약 4420억원)였는데, 올해 1~5월은 4억572만달러(약 5586억원)로 20% 넘게 증가했다.

콧대 높았던 일본 백화점과 패션 브랜드도 한국에 손을 내밀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지난 5월부터 일본 도쿄 파르코 시부야점 3층에서 한국 패션 브랜드인 마뗑킴·마리떼프랑소와저버 등을 소개하는 팝업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다. 운영 두 달 만에 매출은 26억원을 돌파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역대 파르코백화점에서 진행한 팝업스토어 중 매출 기준 1위 기록”이라고 말했다.

국내 여성 의류 브랜드 마르디 메크르디는 지난달 도쿄의 청담동으로 불리는 다이칸야마에 2층짜리 단독 매장을 열었다. 지난해 일본의 한큐백화점과 쇼핑몰 루미네 경영진은 더현대 서울의 ‘벤치마킹 투어’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 백화점이 벤치마킹했던 일본 백화점들이 이제 한국을 배우러 오고 있는 것이다.

LG생활건강은 지난 2월 일본 드럭스토어 웰시아·선드럭 등에 샴푸 브랜드인 엘라스틴을 입점시켰다. 업계 관계자는 “통상 샴푸·바디워시 등 생활용품은 전 세계 어딜 가든 자국 브랜드나 글로벌 브랜드가 있어서 해외 진출의 마지막 단계로 본다”며 “한국 제품의 일본 시장 진입 장벽이 그만큼 낮아졌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한국 제품 품질 인정 받아

일본 시장의 진입 장벽이 낮아진 건 왜일까. 유통업계 관계자는 “일본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국 제품에 대한 호감도가 확실히 올라갔다”며 “한국 제품은 품질이 좋고, 유행을 빠르게 반영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한국과 일본은 체형과 취향 등에서 겹치는 게 많다”며 “한국 기업들은 한국 시장에서 통하는 제품은 일본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일본 소비자들은 한국에서 인정받은 건 믿고 사도 된다는 인식이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화장품·패션뿐 아니라 식품도 일본 시장을 뚫고 있다. 삼양식품은 지난달 일본 시장만을 위해 불닭 포테이토칩 3종을 출시하고, 돈키호테·라이프 등 일본의 대형 소매점 2000점에 입점시켰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불닭볶음면이 일본 젊은 층에서 높은 인기를 얻자, 포테이토칩 개발 단계부터 일본 바이어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고 말했다.

미국 수제 햄버거 브랜드 파이브가이즈는 내년 하반기 일본에 진출해 7년 동안 도쿄를 포함해 20개 이상의 매장을 연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이 미국 브랜드를 일본에 진출시키는 주체가 한국에서 파이브가이즈를 운영하는 에프지코리아다. 한화갤러리아의 100% 자회사인 에프지코리아는 지난달 파이브가이즈 인터내셔널과 ‘파이브가이즈의 일본 시장 진출’을 골자로 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글로벌 브랜드가 한국에서 성공 경험을 쌓은 한국 기업에 일본 시장 진출을 맡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