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정부는 적기에 원전을 건설한 경험이 많은 한국수력원자력을 선정해야 한다.”
지난달 27일 체코 원전 건설 예정지인 두코바니 지역 신문 ‘호라츠케 노이비니’에는 두코바니·트레비치 등 주변 지역 주민협의회 명의의 성명서가 보도됐다. 원전 발주처(EDUⅡ)가 두 달 동안 평가를 진행한 이후, 프랑스가 한국을 제치고 선정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던 때였다. 성명에는 “한수원은 8년간 지역과 협력해왔다”며 “우선협상대상자는 지역과 협력해 온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막판 수주전이 치열하던 이달 초 프랑스 EDF가 현지 매체 2곳에 “체코 국민 중 75%가 EDF를 지지한다”는 광고를 냈지만, 지역 민심은 이미 한수원 편이었다.
18일 서울 중구 한수원 방사선보건원에서 만난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며 “프랑스 측이 갖은 공격을 계속하던 상황에서 현지 주민들의 지지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응원이었다”고 했다. 체코가 발주를 하기 전부터 이 지역에 사무소를 내고 주민들의 환심을 얻어온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그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만큼이나, 그때 지역 주민들이 우리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감격스러웠다”고 덧붙였다.
2022년 8월 취임 후 지난 23개월간 수주전의 실무를 지휘한 황주호 사장은 “우선협상자로 선정되기까지 세 번의 결정적인 장면이 있었다”며 “그중 마지막이자 최고의 순간이 바로 이날이었다”고 말했다.
황 사장이 꼽은 첫 번째 장면은 1월 31일이었다. 체코 정부는 이날 신규 원전 건설 규모를 1기에서 4기로 늘리고, 한수원과 프랑스 EDF에 입찰 참여를 요청했다. 황 사장은 “갑자기 질문이 달라지니 당황했다”며 “몇 년을 원전 1기 건설에 맞춰 준비했는데, 판이 4배로 커지면서 뭐부터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다”고 했다. 원전 종주국 미국은 빠졌지만, 15년 전 UAE(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주전에서 우리에게 밀린 프랑스와 유럽에서 리턴 매치를 벌이게 된 것도 부담됐다. 황 사장은 “하지만 80여 명이 두 달 반 동안 몰입, 2기·3기·4기를 지을 때를 나눠 어떤 결과를 얻을지를 다시 정리해 역제안했고,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두 번째 결정적 장면은 4월에 찾아왔다. 최종 입찰서 마감을 열흘 정도 앞둔 시점에 프랑스의 요청으로 제출 마감이 15일에서 30일로 갑작스레 바뀐 것이다. 황 사장은 “마감일이 한쪽의 요청으로 미뤄지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며 “프랑스가 무슨 무기를 숨기고 있는지, 프랑스에 유리하게 평가가 진행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고 말했다. 한수원의 선택은 마감일보다 하루 빠른 ‘29일 제출’이었다. 그는 “현지에서 기자들이 ‘왜 이렇게 빨리 제출하느냐’고 묻기에 ‘1만km 떨어진 한국에서 올 땐 항공편 지연 등 여러 변수를 대비해야 한다. 원전 건설은 엄청난 리스크를 관리해야 하는 일이고, 우리의 리스크 관리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황 사장은 “이미 우리는 기존 일정에 맞춰 모든 게 준비돼 있었다”며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진짜 ‘어제’ 가면서 의지와 성의를 보인 것”이라고 말했다.
한수원은 2016년부터 현지에서 직원과 자원봉사 대학생 등이 벽화 그리기, 소외 계층 지원, 공공체육시설 정비 등 지역 봉사 활동을 펼치며 주민들을 ‘내 편’으로 만들었다. 발표를 한 달 앞둔 지난 6월, 2018년부터 후원해온 트레비치 아이스하키팀 후원 기간을 내년 8월까지로 연장한 것도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황 사장은 “오히려 주민들이 다음 달이 발표인데 벌써 연장하느냐고 하더라”고 전했다.
“같은 유럽국인 프랑스의 국력과 위상에 대해 우려가 컸다”고 하자 황 사장은 “나라 대 나라 간 총력전에서 우리가 이긴 것”이라고 평가했다. 기술력, 시공 능력 등 원전 자체 경쟁력은 물론, 제조업 기반, K팝과 같은 문화 등 우리의 다양한 강점이 수주전에서 발휘됐다는 것이다. 황 사장은 “우리가 짓는 원전에서 만들어진 질 좋은 전기를 받아 쓰는 곳은 배터리, 자동차처럼 우리가 강점을 지닌 산업군”이라며 “이번 수주는 마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국력이 바탕이 된 결과”라고 말했다.
황 사장은 “2022년 11월 최초 입찰, 지난해 10월 수정 입찰, 올 4월 최종 입찰까지 입찰서를 낼 때마다 3개월씩 협력업체 직원을 포함해 80여 명이 경주 본사와 대전 중앙연구원에서 서류를 작성했다”며 “그때마다 A4 1만2000쪽, DVD로 24장(용량 3GB)을 만들고, 제출한 뒤엔 체코 프라하에 가서 3~4일씩 발주처와 질의응답을 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그는 “최종 입찰서를 내던 4월쯤에는 ‘발주처가 우리를 인정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결국 이길 수 있었다”며 “벌써 어젯밤에 전화가 와, 다음 주 체코에서 킥오프 미팅(프로젝트를 위한 첫 미팅)을 갖자고 하더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