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인천 청라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 사건을 계기로 전국 아파트 곳곳에서 전기차 주차 분쟁까지 벌어지는 가운데, 화재가 최초 발생한 차량인 벤츠 EQE에 중국 기업 ‘파라시스(Farasis)’의 배터리가 탑재된 사실이 지난 5일 국토부 조사 결과 확인됐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세계 최고 수준의 명품 자동차로 알려진 벤츠가 왜 세계 10위권인 중국 배터리 업체의 제품을 썼는지에 대한 의혹까지 일고 있다. 온라인 자동차 동호회 등에선 “1억원짜리 차에 듣도 보도 못한 배터리가 탑재됐다니 실망스럽다”는 반응도 나온다.
◇벤츠는 왜 10위권 업체 배터리를 썼나
업계에 따르면, 벤츠는 2010년대 전기차 전환에 나서면서 초기 모델에 LG에너지솔루션 등의 배터리를 탑재했다. 그러나 2018년 벤츠 모회사인 다임러는 중국 신생 업체 파라시스와 10년간 170GWh(기가와트시) 규모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었다. 2020년엔 벤츠가 아예 파라시스의 지분 3%를 인수하며 협력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2022년부터 출시된 준대형 전기차 EQE는 파라시스가 주 공급사였다. 당시 국내 배터리 기업들도 벤츠에 배터리 공급을 위한 경쟁에 참여했지만 탈락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름도 생소한 신생 회사여서 우리도 의아했다”며 “중국 배터리는 우리보다 가격이 30~40% 저렴한데, 벤츠는 실력이 부족한 부품사라도 벤츠 자체 기술력으로 그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강했다”고 말했다.
이런 결정에는 벤츠의 1대, 2대 주주가 모두 중국이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벤츠는 140년 역사를 가진 독일 기업이지만, 지리자동차의 리슈푸 회장이 소유한 투자회사 TPIL이 벤츠의 지분 9.69%를 사들여 2018년 최대 주주에 올랐다. 2019년엔 베이징차가 벤츠 지분 9.97%를 확보해 새로운 최대 주주에 올랐고, TPIL이 현재 2대주주다.
벤츠가 파라시스와 처음 협력 관계를 맺은 2018년은 리슈푸 회장 측이 벤츠 최대 주주로 등극했던 시기와 일치한다. 벤츠는 이후 대형 전기차인 EQS에도 세계 1위이자 중국 최대 배터리 업체인 CATL의 제품을 넣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산이 가격이 더 싼 데다 중국 전기차 시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중국 눈치를 본 측면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파라시스 배터리의 품질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2021년 2월 독일 유력 경제지 ‘매니저 매거진’은 “파라시스 배터리 샘플의 품질이 재앙적”이라며 “다임러(당시 벤츠 모회사)와 협력 관계가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그해 중국에선 베이징차가 파라시스 배터리 결함에 의한 화재 우려로 대규모 리콜을 단행했다. 업계 관계자는 “벤츠는 품질 문제가 발생하자 CATL의 배터리 공급을 늘려 파라시스를 대체해왔으나, 일부 차량에는 파라시스 제품이 탑재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자동차와 배터리의 불안한 동맹
세계 최고 럭셔리카와 세계 10위 배터리의 공조는 최근 4~5년간 급격히 진행된 전기차 전환에 따른 ‘불안한 동맹’의 대표 사례다. 그동안 완성차 기업들은 내연차 핵심인 엔진과 변속기를 포함한 대부분의 부품을 관리·제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 기술과 설비는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전기차 변환이 닥치면서 배터리 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올 1분기 매출 기준 글로벌 10대 배터리 기업에는 중국(48%), 한국(25%), 일본 기업만 포함돼 있다.
이 때문에 상하관계가 또렷했던 완성차와 부품사의 관계는, 배터리사에 한해선 대등한 협력 관계로 바뀐 상황이다. 청라 화재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터질 경우 양쪽이 갈등을 빚기도 했다.
국내에선 지난 2020년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이 전기차 화재를 두고 책임 공방을 벌인 적이 있다. 앞서 국내외에서 현대차의 전기차인 코나에서 10여 건의 화재가 연이어 발생했고, 국토교통부 조사 끝에 현대차의 전기차 중 같은 배터리를 쓰는 약 8만대 전기차가 리콜됐다.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은 3대7로 리콜 비용을 분담했다. 배터리 기업과 완성차가 책임을 분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