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에너지 중장기 계획인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2024~2038년)’이 또 부처 간 협의 시한을 넘겼다. 당초 오는 20일까지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가 환경부와 협의를 마치고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데, 환경부와 협의 시한마저 지키지 못한 것이다. 당초 11차 전기본은 계획 기간이 시작되는 올해 이전인 지난해 하반기까지 마무리했어야 하지만, 올 들어 8개월이 지나도록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전력 수요 전망과 발전소 건설 일정 등을 담은 전기본은 국민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국내외 기업들이 투자 결정을 할 때에도 필수적으로 고려하는 계획이다. 이 같은 중요성 때문에 대부분 국가들은 에너지 중장기 전망을 미리 제시하는 게 일반적이다.

쉴틈없이 돌아가는 실외기 - 지난 5일 서울 시내 한 건물 외벽에 에어컨 실외기들이 설치돼있는 모습. 이달 들어 최대 전력 수요 기록이 잇달아 경신되고 있다. 냉방용 전력 외에도 데이터센터 같은 전력 다소비 업종이 늘고 반도체 등 전기를 많이 쓰는 산업의 규모가 확대됐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김지호 기자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정부가 밀어붙인 탈원전 정책의 여파로 에너지 수급 체계가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최근 세계적으로 부는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구전난(求電難)이 심화하며, 중장기 정책 수립은 어느 때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올해 사상 최악의 폭염 속에 전력 총수요 100GW(기가와트)가 ‘뉴노멀’이 되며 전력수급 위기감까지 커진다. 세계 각국이 AI 시대 패권 경쟁을 위해 안정적인 전기 공급 능력 확보에 전력을 다하는 상황에서 이대로 가다가는 글로벌 에너지 확보전에서 뒤처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그래픽=이철원

◇설왕설래 끝에 5월에야 초안

18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최근 환경부는 11차 전기본 초안에 대한 전략환경·기후변화 영향평가 과정에서 산업부에 ‘보완 요청’을 했다. 이 같은 보완 요청이 없었다면 20일인 부처 협의 시한 이후 최종안을 작성하고, 공청회와 국회 보고 등 일정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적어도 1~2주는 관련 일정이 밀릴 것”이라며 “국감 등 국회 일정 등을 감안하면 늦으면 11월쯤 최종안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뒤늦게 11차 전기본을 위한 총괄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력 수요 예측치와 주요 발전원별 비중 추이를 담은 초안이라도 연말까지 내놓고 최종안은 아무리 늦어도 올 상반기까지는 발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일정은 이후에도 줄줄이 ‘연기 또 연기’됐다. 지난해 연말까지 내놓겠다던 11차 전기본 초안은 지난 5월 말에야 발표됐다. 지난 정부에서 ‘탈원전’을 추진하며 에너지 정책이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간 상황에서 4월 총선을 의식해 발표를 늦춘다는 관측까지 나왔다.

전기본이 최근 들어 중요성이 커지는 송배전망 건설 계획은 물론 천연가스, 수소, 재생에너지 등 각종 에너지 계획의 근간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우려가 나온다. “전기본이 늦어지면 에너지는 물론 제조업 등 국내 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진다.

그래픽=이철원

◇전력 확보 정책 잇달아 내놓는 각국

지지부진한 우리나라와 달리 해외 각국은 법을 만들고, 중장기 전력 정책 목표를 내놓으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2022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라 러시아로부터의 천연가스 공급이 막히며,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절감한 유럽 각국은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 탈탄소 비중을 늘리겠다는 목표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미국은 대선 정국이 한창이지만 초당적 지지 아래 지난달 조 바이든 대통령이 ‘청정에너지를 위한 원전 배치 가속화 법안’에 서명하며 원전을 통한 전력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원전 건설 기간을 단축하고, 사업자의 원전 건설 비용 부담을 줄이는 법안이다.

지난달 EU(유럽연합)에 제출한 ‘통합 국가 에너지 기후계획’에서 프랑스는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를 결합한 탈탄소 비율 목표치를 2030년 58%, 2035년 71%로 제시했으며, 이탈리아는 2030년까지 131GW에 이르는 재생에너지 설비를 확보하는 데 이어 이후 2050년까지 원전 설비를 최대 16GW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풍력 등 재생에너지 위주 정책을 펴온 영국도 올 1월 2050년까지 원전 용량을 지금의 4배로 늘리겠다는 ‘2050 원전 로드맵’을 발표했다.

발전량의 70%를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중국은 빠르게 늘어나는 신재생에너지와 원전을 전력 수요지와 잇기 위한 전력망 확충에 속도를 내면서 이달 초 국가개발위원회·국가에너지국·국가데이터국 등 중앙부처 3곳이 공동으로 송배전망 고도화를 위한 ‘신형 전력 시스템 구축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박주헌 동덕여대 교수는 “해외 각국과 달리 우리 정부 당국은 아직도 전력 수급 문제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와 정치권의 안일함이 위기를 재촉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