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의 철학과 업적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이순신 학과(學科)’의 1호 박사가 배출됐다. 1947년생, 일흔일곱 나이에 대구가톨릭대 이순신학과에서 ‘고하도·고금도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이순신의 승리 전략 연구’라는 주제로 161쪽 분량 학위 논문을 쓴 박사다.
2022년 대구가톨릭대 일반대학원에 신설된 ‘이순신학과’도 생소하지만, ‘1호 박사’의 이력도 특이하다. 작년 연 매출 2조원에 달하는 화장품·제약기업 한국콜마 창업주 윤동한(77)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한국콜마는 로레알, 에스티로더, 아르마니, 키엘 등 세계적 화장품 브랜드의 주문을 받아 제조업자개발생산(ODM) 방식으로 만들어 공급한다. 연간 국내외 900여 고객사의 기초 화장품 4억5000만개를 만든다. 코스맥스와 함께 ‘K뷰티’ 제조 강자이자 세계적인 화장품 제조 전문기업으로 꼽히는 회사다.
1990년 한국콜마를 창업해 이같이 성장시킨 윤 회장은 대구가톨릭대 제약공학과에선 ‘석좌교수’지만, 지난 2년간 이순신학과에선 박사과정 학생으로 논문을 썼다. 지난 22일 학위수여식에서 ‘이순신학(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윤 회장과 23일 전화 인터뷰를 통해 ‘왜 이순신이었나’에 대해 들어봤다.
그는 “1990년 안정적인 직장을 나와 창업할 때 롤모델을 찾다가 이순신을 접했다”며 “육지에서 생활할 수 있는 병마절도사 자리를 포기하고 수군절도사를 고집하며 결국 나라를 지켜낸 그의 발자취를 보고, 그를 따라 ‘한길’만 집중하면 기업도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2017년 이순신의 자(字) ‘여해’를 딴 서울여해재단을 만들고, 이순신을 주제로 책도 두 권이나 쓴 ‘이순신 마니아’다.
윤 회장은 “그간 한국에서 이순신 연구는 해전(海戰) 전략, 군사 측면에만 집중돼 아쉬움이 있었다”며 “박사 논문에선 군사, 지리, 행정, 인사, 재정 등 다방면 통달한 종합 경영인으로 이순신을 조명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2008년 수원대 경영학 박사, 지난 2월 세종대 명예 이학 박사에 이어 세 번째 박사 학위다. 윤 회장은 영남대 경영학과 졸업 후 농협을 거쳐 1974년 대웅제약에 입사해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1988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1990년 직원 단 3명과 함께 한국콜마를 창업했다.
윤 회장은 책으로만 이순신을 접하지 않고 이순신의 발자취가 남은 곳을 수차례 찾았다. 논문 주제로 삼은 전남 목포시 고하도, 완도군 고금도 모두 마찬가지다. 윤 회장이 20여 년 전부터 셀 수도 없이 수차례 찾았던 두 섬은 이순신이 머무르며 전략 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고하도는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지점으로, 이곳을 사수하지 못하면 호남의 곡창 지대를 왜구에 내어주는 전략 요충지였다. 이곳에서 자란 소나무는 함선 건조에도 적합했다. 윤 회장은 “이순신은 해전에만 강했던 게 아니라 지리에도 밝았고, 병참기지 조성까지 통달한 리더였기 때문에 논문도 이런 복합적인 측면을 조명할 수 있는 주제로 정했다”고 했다. 인문지리를 전공한 이상율 교수가 지도교수를 맡았다.
윤 회장은 대한민국학술원,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을 찾아 문헌 연구를 했고, 고하도·고금도를 수차례 오가며 논문을 썼다. 윤 회장은 “논문을 쓰면서 원문 연구를 깊이 있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경영인 관점에서 이순신을 다방면으로 접근했다는 건 장점”이라고 했다.
윤 회장은 경영인 시각으로 이순신을 연구해 앞서 책도 두 권이나 냈다. 2019년 이순신의 멘토 ‘80세 현역 정걸 장군’을 썼고, 2022년에는 충무공의 어머니 초계 변씨를 다룬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를 출간했다.
대구가톨릭대가 2022년 국내 최초로 개설한 이순신학과도 윤 회장이 앞장섰다. 이순신을 연구하는 ‘학과 간 협동 석박사 과정’인데 여해재단에서 장학금을 지원한다. 2022년 신입생으로 등록하고 이번에 학위를 딴 윤 회장도 수업을 함께 들었다. 윤 회장과 함께 4명이 졸업했고, 현재 17명이 재학 중이다. 다음 학기에는 2명이 새로 입학한다.
윤 회장은 기업인으로 이순신학과 지원뿐 아니라 논문까지 쓴 이유에 대해 “이순신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연구를 누군가는 먼저 개척해야 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