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이후 매년 세계에서 팔린 전기차(중국 시장 제외)의 절반 안팎은 한국 기업들이 만든 K배터리를 달고 달린다. 엄청난 보조금으로 빗장을 걸어 잠근 중국을 제외하고,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 등 내연차 시대 초강대국들의 자동차 업체들도 ‘K배터리 모셔가기’ 경쟁을 벌일 정도다. 2020년부터 최근까지 비(非)중국 시장에서 K배터리 3사의 점유율은 50% 안팎을 유지해왔다. 자국 기업이 사실상 독점한 중국 시장을 포함해도 점유율은 약 25%다. LG에너지솔루션은 작년 말 세계 1위 도요타에서 배터리 공급 계약을 따내면서 판매량 기준 세계 10대 자동차 회사 중 9곳을 고객으로 두게 됐다. 미국의 여러 주(州) 정부, 캐나다, 유럽 국가 등은 K배터리 공장 유치전도 벌인다.
배터리뿐 아니라 이전 단계인 소재·부품·장비에서도 K배터리 생태계가 ‘수퍼 을(乙)’로 통했기에 가능했다. 수퍼 을이란 반도체의 ASML처럼 부품 업체지만 납품받는 기업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의 경쟁력을 갖춘 기업을 말한다. 전기차·배터리 산업에서 양극재 등 핵심 소재가 없으면 고성능 배터리를 만들 수 없고, 완성도 높은 부품·장비가 없다면 배터리 생산 수율을 담보할 수 없다. K배터리는 소재부터 배터리 완제품까지 탄탄한 공급망을 조성했다.
그러나 최근 전기차 위기론 속에 이런 수퍼 을 생태계가 벌써 흔들리기 시작했다. 배터리 3사 영업이익은 급감했고, 대규모 투자도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 에코프로와 SK온이 미국 포드와 합작한 1조2000억원 규모의 캐나다 양극재 공장 건설이 잠정 중단되고, 포스코그룹이 이차전지 사업 목표를 하향 조정했다. 배터리 업계에선 “탄탄한 생태계를 지키지 못하면 향후 전기차 속도전이 재개될 때 주도권을 잃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