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그룹이 소형 굴삭기를 만드는 두산밥캣과 협동로봇을 만드는 두산로보틱스를 통합시키는 합병 계획을 29일 철회하기로 했다. 지난달 11일 두산그룹이 ‘에너지·스마트머신·첨단 소재’를 3대 축으로 하는 사업구조 개편안을 발표한 지 한 달 반 만이다. 양사 간 합병 비율에 대해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등 주주 단체가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뒤 일부 주주들이 동조하고, 금감원까지 나서 두산을 압박하자 당초 사업구조 개편안을 크게 수정한 것이다.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는 이날 각각 이사회를 열고 사업구조 개편을 위해 추진하던 양사 간 포괄적 주식 교환 계약을 해제하기로 결의했다고 밝혔다. 양사는 이날 각각 대표이사 명의의 주주 서한을 내고 “사업구조 개편 방향이 긍정적일 것으로 예상되더라도 주주 분들과 시장의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하면 추진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두산은 다만 원전 설비 기업인 두산에너빌리티에서 밥캣을 떼어내 로보틱스 산하에 두는 1단계 개편은 원안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전례 없는 세계 원전 시장 확대로 설비 투자가 시급한 두산에너빌리티가 투자 자금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철회한 밥캣과 로보틱스의 통합은 향후 법 개정 등을 지켜본 뒤 재추진을 검토하기로 했다.

그래픽=양진경

◇한 달 반 만에 철회

당초 두산은 밥캣 1주당 로보틱스 0.63주를 교환하기로 하는 합병안을 추진했으나, 밥캣 주주들의 반발을 불렀다. 두산밥캣은 연간 1조원의 영업이익을 내는 알짜 기업이다. 반면 두산로보틱스는 지난해 매출 530억원에 192억원의 적자를 냈다. 하지만 주가는 로보틱스가 더 높다. 국내 협동로봇 시장 1위로 미래 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투자가 몰린 것이다. 두산그룹은 “시가대로 교환 비율을 산정하는 자본시장법을 따랐다”고 했지만, 밥캣 일부 주주들은 “법을 최대한 악용한 사례”라며 비판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지난달 “현행 자본시장법의 합병 비율 산정 기준에 문제가 있다”는 세미나를 열었고, 밥캣 주주인 외국인 투자자가 나와 “화가 나서 주식을 대거 매도했다”며 “미국에선 시가총액이 아니라 공정가치로 따진다”고 지적했다.

두산이 정부가 추진하던 밸류업 정책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지적이 나오자, 금감원도 가세했다. 금감원은 지난달 24일 두산로보틱스가 합병안을 담아 제출한 증권신고서를 정정할 것을 요구했고, 이복현 금감원장은 두산이 정정 신고를 한 지 이틀 만인 8일, “증권신고서에 부족함이 있다면 횟수 제한 없이 정정을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26일, 금감원은 두산의 증권신고서를 두 번째 반려했다.

결국 이틀 후인 이날 두산이 이사회를 소집해, 그동안 금감원과 주주들의 반발이 집중됐던 ‘주식 교환 방식의 합병’ 계획을 철회하기로 한 것이다.

◇원전 투자 시급... ‘밥캣 분리’는 추진

두산그룹은 그러나 두산에너빌리티 산하에 있던 밥캣을 떼어내, 로보틱스 산하로 이동시키는 안은 원안대로 추진한다. 이렇게 되면 밥캣은 로보틱스가 지분 46.1%를 보유한 계열사로 남게 된다.

두산그룹이 사업구조 개편안 일부를 계속 추진하려는 것은, 주력인 원전 사업 확장을 위해 두산에너빌리티의 투자금 확보가 시급하기 때문이다. 이번 분할을 통해 에너빌리티는 7000억원의 차입금 부담을 덜게 된다. 여기에 큐벡스 등 비영업용 자산을 ㈜두산에 매각함으로써 5000억원의 현금을 추가로 마련할 수 있다. 1조원이 넘는 투자 여력이 확보되는 것이다.

두산에너빌리티는 국내 유일의 원전 주기기 제조 기업으로 전례 없는 수주 기회를 맞고 있다. 지난달 24조원 규모의 체코 원전 수주전에 한수원 등과 함께 팀코리아로 참여해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된 데 이어, 폴란드, UAE, 사우디,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에서도 추가 수주가 기대되고 있다. 향후 5년간 약 10기에 달하는 수주를 기대하는 상황에서 기존 설비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박상현 두산에너빌리티 대표는 앞서 ”주기기는 연 4기 이상, SMR(소형모듈원전)은 연 20기 규모로 생산이 가능한 시설 구축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밥캣과 로보틱스를 완전히 통합시켜 건설기계 무인화와 협동 로봇 판로 확대 등 시너지를 기대했던 두산그룹은 향후 시장을 보면서 재추진을 검토한다는 계획이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추후 시장과 소통하고, 합병 비율 산정 관련 제도 개선 등을 지켜보며 양사 간 시너지를 위한 방안을 계속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