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는 9월 실시한 신입사원 수시 채용에서 132개 부문에 걸쳐 지원서를 받았다. 연구·개발(R&D) 부문만 58개다. 내역을 들여다보면 고성능차 프로젝트 관리, 고성능차 개발, 로봇 사업 관리, 배터리 설계, 배터리 셀 개발, 배터리 제어개발 등 세세하게 분야가 나뉘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성능차 프로젝트 관리 분야의 경우 ‘기계·자동차·산업공학 등 이공계열 전공자’ ‘고성능차 관련 기초지식 보유자’ ‘자동차·항공 공모전 활동 경험’ ‘경진대회에서 리더 역할’ 등이 있어야 우대를 받을 수 있다고 적혀 있다.
현대차에 지원했던 박모(27)씨는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서는 현대차가 요즘 가장 선호하는 기업이지만, 채용 공고에 나열된 것들은 이제 대학 졸업을 앞둔 사람은 쉽게 갖출 수 없는 스펙”이라고 했다.
이런 변화는 현대차가 지난 2019년 모든 채용을 수시 채용으로 바꾼 결과다. 신입사원의 경우 과거 상·하반기 한 번씩 선발하던 것을 이제는 1년에 4차례 뽑는다. 구체적인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LG그룹, SK그룹, 롯데그룹 등 주요 대기업들이 최근 수년간 잇따라 수시 채용으로 전환했다.
한국 사회가 고속성장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은 대규모 공채로 청년들을 뽑은 뒤 자체적으로 교육해 그 회사의 ‘산업 전사’로 빠르게 키워냈다. 하지만 요즘은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공채로 어디에서나 평균 이상의 능력을 내는 범용(汎用) 인재를 찾기보다 수시 채용으로 필요할 때 적재적소에 투입 가능한 스페셜리스트를 뽑으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런 ‘공채의 종말’이 본격화하면서 취업 준비생들의 어려움은 더 커지고 있다. 원하는 분야의 구직 공고가 날 때까지 1년 내내 대기해야 하고, 지원 분야를 세분화하면서 채용 공고에 나오는 선발 인원은 더 줄어들었다. 거기다 직무에 따른 구체적인 역량까지 요구하면서 경험이 많은 ‘중고 신입’만 찾는 곳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지원서 ‘난사’하는 시대
서울의 유명 사립대를 졸업한 장모(27)씨는 올해 9월까지 대기업 입사지원서를 30번 냈다. 현대차에 2번, 롯데에 2번 등 한 기업에 2~3번씩 원서를 쓰기도 했다. 공채 대신 수시 채용이 늘면서 원서를 더 많이 쓰게 된다고 했다.
거기다 원하는 분야 공고가 나지 않을 때도 잦다. 장씨는 경영학을 전공해 재경 부문 취업을 희망하는데, 올 초 한 대형 플랫폼 기업이 신입사원 채용 공고를 띄워 들어가 봤더니 재경 부문은 아예 선발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그는 홍보, 마케팅, 영업 등 마구잡이로 원서를 내고 있다.
특히 자동차나 조선 등 일부 업종을 제외하면 올해 경기 침체가 뚜렷해지면서 수시 채용의 단점이 더 두드러지고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내부적으로 채용 규모를 줄인 곳이 늘었는데, 수시 채용으로 ‘적게 여러 번 뽑는’ 방식까지 쓰니 지원자들은 취업 문이 더 좁아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HR기업 인크루트 조사에서도 작년 하반기 채용을 준비하는 대기업의 70%는 두 자릿수 채용을 하겠다고 했지만, 올해는 이 비율이 46.2%로 떨어졌다. 사립대 졸업한 취업 준비생 강모(26)씨는 “기업별로 요구하는 것도 다르고 선발 시기도 제각각이니 늘 취업 공고를 살피고 원서를 쓰면서 지낸다”며 “입사지원서를 ‘난사(亂射)’하는 시대”라고 했다.
◇대세 되는 중고 신입
수시 채용이 대세가 되면서 기업들 사이에선 이른바 ‘중고 신입’을 원하는 분위기도 강해지고 있다. 서울 사립대 4학년 김모(27)씨는 작년 A 기업 면접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같이 면접을 본 6명 가운데 4명이 이미 다른 회사 정규직으로 입사해 1년 안팎 일하다 이 회사 신입사원으로 다시 지원한 것이다. 결국 김씨는 그 면접에서 떨어졌고 “나도 어디라도 취업했다가 다시 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고 했다.
실제 한국경제인협회가 매출 상위 500대 기업을 조사한 결과 전체 신입사원 중 중고 신입 비율은 재작년 22.1%에서 작년 25.7%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지만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는 “수시 채용이 장점도 있지만 공채 시대에 기업이 맡았던 청년 교육 기능이 구직자들에게 전가되면서 경력을 쌓기 위해 사교육 등 취업 준비 비용이 많이 늘어나는 부작용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