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 펀드 MBK와 고려아연 경영진의 경영권 분쟁이 3조원대 ‘머니 게임’으로 확전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재계 안팎에서는 기존 최대 주주인 영풍과 손잡은 MBK는 최소 33.1%, 고려아연은 현대차·한화·LG화학 등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을 가정해 약 34%의 지분을 확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 입장을 밝히지 않은 국민연금과 의결권 없는 자사주를 뺀 약 23% 지분이 당장 눈앞의 경영권 분쟁의 향방을 가를 전망이다. 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지분을 확보하느냐의 싸움이 된 것인데, 여기에 양측이 투입하려는 실탄의 규모가 총 3조원을 웃돈다.

경영권을 지키려는 고려아연 안팎에서는 약 1조원 안팎을 투입해 우호 지분을 6%포인트 늘리는 것이 관건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관·외국인 중 6%가량은 이미 우호 지분이고, 6%포인트만 더하면 MBK 측의 과반 확보를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지난 13일 주식 공개 매수를 시작한 MBK는 최대 14.6%를 확보하면 확실하게 과반을 차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경쟁 끝에 누가 주도권을 잡더라도 자칫 ‘승자의 저주’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양측이 높은 금리와 수익률을 약속하며 자금을 유치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만큼, 앞으로 누가 경영권을 쥐든 미래를 위한 투자보다 현재 지분 경쟁의 후폭풍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픽=백형선

◇누가 이겨도 회사는 상처

지난 13일 MBK가 공개 매수를 시작하면서 제시한 매입 가격은 1주당 66만원이다. 23일 종가 기준 고려아연 주가는 72만3000원으로 이보다 높게 형성돼 있다. 개인·외국인·기관 등은 주가보다 매입가가 높아야 공개 매수에 응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주가가 더 내려가지 않으면, MBK가 오는 26일 전후 공개 매수가를 높이고 그 뒤 고려아연이 방어 차원에서 대항 공개 매수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고려아연은 최소 방어선인 6%를 추가로 확보하기 위해 대항 공개 매수에 필요한 자금 약 1조원 안팎을 마련하기 위해 물밑 작업 중이다. 한국투자증권, 소프트뱅크, 베인캐피털, 스미토모상사 등이 우군 후보로 거론된다. MBK는 단기 차입 등으로 이미 약 2조원의 조달 준비가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지분 경쟁이 과열되는 것은 고려아연이나 MBK에 모두 부담이 될 것이란 지적이 많다. 특히 고려아연의 경우, ‘경영권 인수’라는 당근을 투자자에게 제시할 수 있는 MBK와는 달리, 자금을 지원해 주는 우군에게 어떤 형태로든 금전적인 이익이 생길 수 있는 다른 조건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MBK도 부담이 상당하다. 마련한 자금 2조원 중 약 1조5000억원을 내년 6월 만기, 최소 고정 금리 5.7%에 차입하기로 한 상태다. 9개월 후 만기까지 이자만 약 630억원에 달한다. 공개 매수가를 66만원에서 더 높게 올릴 경우, 조달 비용 부담이 커져 투자금 회수가 어려워진다.

재계 관계자는 “누가 승자가 되든, 경쟁 과정에서 발생한 각종 비용이 향후 고려아연 회사 자체에 반영돼, 자칫 미래 투자에 나설 현금을 끌어다 쓰는 등 회사 가치에 악영향을 주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상처뿐인 영광인 경영권 분쟁

실제 재계에서 일어난 경영권 분쟁 다수는 결과적으로 기업 가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사례가 많았다. 특히 고려아연은 전자·전기,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주요 산업에 아연·동·은 등 기초 원자재를 공급하는 기간산업이라, 경영권 분쟁 후폭풍에 시달릴 경우, 파장이 작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크다.

그래픽=백형선

지난해 카카오의 경우 SM엔터테인먼트 인수를 두고 하이브와의 경쟁에서 이겼지만 오히려 타격을 받고 있다. 당시 공개 매수 과정에서 사모 펀드 등과 공모해 시세 조종을 한 혐의가 포착돼 김범수 창업자가 구속 기소되며 중요한 의사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작년 말 MBK 개입으로 형제간 경영권 분쟁을 겪은 한국앤컴퍼니(한국타이어) 역시 대외적으로 경영진의 지배력이 약하다는 인식이 생겨 경영에 일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 10년 새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을 겪은 롯데그룹이나, 한진그룹 역시 경영권을 두고 다투는 과정에서 현 경영진이 모두 승리했지만 중요한 의사 결정을 실기(失期)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지적을 받는다.

◇고려아연 기술인력들 “사표 불사”

한편 고려아연 안팎에서는 MBK 측 경영권 인수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더 커지고 있다. 한국앤컴퍼니, 휴스틸, 한국금거래소 등 고려아연의 국내외 고객사 80여 곳은 23일 “사모 펀드는 투자 수익 확보를 위해 독단적 경영을 할 가능성이 크고 향후 투자를 줄일 수 있어 고려아연 기술이 해외에 유출되거나 경쟁력 저하가 우려된다”고 밝혔다. 또 24일 예정된 고려아연 기자 간담회에선 최고기술책임자(CTO) 이제중 부회장 등 기술 분야 핵심 임직원 20여 명이 참여해 현 경영진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힐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들은 MBK가 경영권을 잡을 경우 집단적으로 사표를 내는 등 강하게 저항할 뜻을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