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조원 규모의 ‘머니 게임’으로 커진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서 ‘자사주 매입’이 막판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사모 펀드 MBK는 고려아연의 현 최대 주주인 영풍과 손잡고 지난 13일 주식 공개 매수를 시작했고, 지난 26일에는 66만원이었던 1주당 매수 가격을 75만원으로 인상하며 공세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이에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 측은 대항 공개 매수로 맞불을 놓는 것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자사주 매입으로 방어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본시장에서는 이 경우 고려아연이 1조원 이상을 동원해 MBK 측이 제시한 공개 매수 가격보다 좀 더 비싸게 자사주를 매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최씨 일가가 직접 지분을 사들이는 대항 공개 매수보다, 고려아연이 자사주를 직접 매입하게 되면 고려아연 입장에선 사모 펀드 등 외부 의존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픽=김성규

관건은 법원의 판단이다. MBK는 앞서 공개 매수를 시작하면서 법원에 고려아연과 그 계열사가 자사주를 사는 것을 막아달라는 내용의 가처분 신청을 함께 냈다. 자본시장법은 공개 매수 기간에 주가조작 가능성 등을 막기 위해 공개 매수자와 매수자의 특별 관계자가 공개 매수가 아닌 방법으로 지분을 늘리는 것을 금지한다.

MBK는 고려아연이 영풍의 계열 회사인 만큼 법으로 정한 특별 관계자라 주장하고, 고려아연은 “적대적 M&A(인수합병)를 시도한 이상 특별 관계자로 볼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이르면 30일 또는 2일에 법원 결정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재계 안팎에선 자사주 매입이 실현돼 분쟁 구도에 영향을 끼칠지 주목한다.

◇외부 개입 줄이는 자사주 매입

고려아연은 법원이 공개 매수 기간(10월 4일까지)에 자사주 매입이 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릴 경우, 이사회를 거쳐 공시를 내고 자사주 매입을 시작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MBK 측이 1주당 75만원에 공개 매수를 하는 만큼, 이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자사주 매입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공개 매수는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한 주주 간 경쟁에 활용된다. 그런 만큼 대항 공개 매수에 나서는 것은 최윤범 회장 등 주주인 최씨 일가이고, 이들이 직접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해 지분을 사야 해 부담이 있다. 이 과정에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예상보다 더 많은 현금이 필요해져 경영권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반면 자사주 매입은 고려아연 법인이 현재 보유한 자금을 활용할 수 있어 사모 펀드 등 외부 의존을 상대적으로 더 줄일 수 있다는 게 유리한 점이다. 매입한 자사주는 소각해 주주 환원 정책으로 쓰거나 우호 기업과 지분 교환을 통해 협업을 강화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고려아연이 지난 25일 기업어음(CP)을 발행해 4000억원을 확보하기로 한 것이나, 메리츠증권에도 3000억원의 자금 지원을 요청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나 베인캐피털 등과도 자금 조달을 협의 중이지만, 자사주 매입이 실현될 경우 애초 예상보다 이들에 대한 의존을 더 줄일 수 있게 될 전망이다.

고려아연 부스 둘러보는 관람객들 - 지난 25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수소 산업 전시회 'H2 MEET 2024' 행사장 내 마련된 고려아연 부스를 정·관계 인사들을 비롯한 일반 관람객들이 둘러보고 있는 모습. /뉴스1

◇배임 여부가 쟁점

자사주 매입이 반격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지만 반론도 있다. MBK·영풍 측은 만약 법원이 고려아연 측 손을 들어줘서 고려아연이 자사주 매입에 나설 경우, 이사회나 경영진의 배임 소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미 주식 공개 매수 기간이라 시세가 비정상적으로 높은데, 그보다 더 비싸게 자사주를 사들이면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MBK 관계자는 “이를 결정한 경영진이나 이사회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고려아연 측은 “자사주 매입으로 이익을 보는 것은 주주이므로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 주주 환원의 일환”이고 “이미 영풍 측은 공개 매수를 시작하며 고려아연 경영진 등을 특별 관계인에서 제외한 공시를 내기도 했다”고 맞서고 있다.

한편 공개 매수 막바지로 가면서 양측의 분쟁이 과열 조짐을 보이자, 금융감독원 이복현 원장은 29일 “시장 질서 교란 행위가 발생할 경우 무관용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나친 경쟁으로 불법행위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