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공기업, 준정부기관의 상임감사의 절반 이상이 정치권에서 온 ‘낙하산’ 인사로 집계됐다. 권력을 잡은 측에서 경영진을 감시하고 견제할 핵심 자리에 전문성이 없는 인사들을 ‘하사품’처럼 내려보냈다는 얘기다. 대부분 감사들은 억대 연봉을 받고 있었다. 최근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김대남 전 대통령실 선임행정관은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뒤 특별한 금융 관련 경력이 없는데도 총선 출마가 좌절되자 차와 기사가 제공되는 연봉 3억원의 SGI서울보증 상근감사로 재직 중인 사실이 드러나 여론의 공분을 얻고 있다.
이를 계기로 본지가 공공기관 경영 정보 공개 시스템 ‘알리오’를 통해 산업통상자원부·기획재정부·금융위 산하 공공기관·준정부기관 40곳을 전수조사했다. 그 결과, 상임감사 자리를 두고 있는 공공기관 28곳 가운데 공석인 5곳을 제외한 23곳 중 13곳(56%)에서 정치권 출신 감사가 재직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외에 군·검·경·국정원 등 권력기관 출신 4명이 경력과는 전혀 상관 없는 에너지 공기업 상근감사로 일하고 있었다. 23명 중 17명(73%)은 ‘범정치권’ 인사로 채워진 것이다. 여야를 가릴 것도 없었다. 야당 때는 ‘낙하산 막자’를 외치다 여당이 되면 ‘낙하산 타자’로 돌변하고 마는 게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 이번 조사에서도 현 정권 출신 인사는 4명이 최근 임명됐고, 문재인 정권 및 민주당 출신 인사도 3명이 아직도 재직 중이었다.
이들이 받는 금액도 상당했다. 이번 조사에서 나온 정치권에서 내려간 13명의 평균 연봉은 1억9160만원, 범정치권까지 포함한 17명은 1억8127만원을 받고 있었다.
상근감사 자리를 정권이 ‘보은성 인사’로 채우는 데 대한 비판이 과거에도 끊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상황이 변하지 않고 있다. 정치 권력이 공공의 영역을 도둑질하는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공공기관 상임감사는 기관장과 달리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 내부적으로는 2인자의 권한을 갖는 ‘꽃보직’으로 알려졌다. 특히 공공기관 중 상근감사를 두고 있는 곳은 대부분 비상장사다. 비상장사는 주주들의 감시를 덜 받기 때문에 상근감사의 전문성이 더 요구되지만, 오히려 견제가 느슨한 점을 악용해 낙하산 인사가 꽂히는 고질적인 문제가 지속되는 것이다.
백상원 한국남동발전 감사는 경남일보 기자, 경상남도의회 도의원(1998~2006년) 출신으로 에너지 관련 경력은 전무하지만 지난달 감사로 임명됐다. 또 2010~2018년 충남 부여 군수가 주요 경력인 이용우 한국중부발전 상임감사도 지난달 임기를 시작했다. 한국가스기술공사에는 이명박 정부 경제수석실 행정관 출신인 송석훈 감사가 지난해 9월 내려왔고, 친박연대 출신인 윤상일 전 의원은 한국전력기술의 감사로 작년 2월 임명됐다.
◇전문성 없는 정치인 줄줄이 꽂혀
민주당 출신으로 전 정권에서 임명돼 업무를 지속 중인 인사도 3명 있다. 임찬기 한국가스안전공사 감사는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운영지원실장을 거쳐 문재인 정부 민정수석실과 정무수석실 선임행정관을 지냈다. 허완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 감사는 차성수 전 금천구청장(더불어민주당)의 비서실장 출신이다. 이전 정부 때인 2021년 12월 임명돼 임기 2년은 지났으나 아직 감사직을 수행하고 있다.
정치권 출신 중 현 정권 인수위 또는 대통령실 출신은 4명으로, 이들은 모두 금융권 공공기관 감사를 차지하고 있었다. 중소기업은행·한국예탁결제원·한국자산관리공사·한국수출입은행으로 이 금융기관들의 감사 연봉은 2억원대에서 3억원대였다.
신용출 윤 대통령 인수위 위원은 연봉 3억4000만원인 한국예탁결제원 감사로 내려갔다. 특히 공공기관에 포함되지 않아 이번 조사에서는 빠졌지만, 김대남 전 행정관이 내려간 SGI서울보증처럼 겉으로는 공기업이 아니지만 대주주가 공기업이나 정부여서 사실상 정권의 입김이 좌우되는 업체들에도 정치권 출신 낙하산이 많이 있다. 검찰 수사관 출신으로 윤 대통령 측근으로 알려진 주기환 전 대통령실 민생특보는 연봉 3억3000만원인 연합자산관리 감사 자리를 얻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 계통은 상대적으로 고액 연봉이 많고 외부 노출도 적어 정치권 인사들이 선호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정치인은 아니지만, 군·검·경·국정원 등 권력기관 출신도 많았다. 한국석유공사에는 검찰 직원 출신인 박공우 상근감사가 재직 중이다. 박 감사는 대검찰청 사무국장 시절,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의 징계에 반대하는 글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지난달 30일 한국동서발전 감사위원으로 임명된 이철원 상임이사(전 주한미군 한국군지원단장)는 2020년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아들 서모씨의 군 복무 시절 특혜 의혹을 제기했던 인물이다.
◇보이지 않는 ‘고연봉 꿀보직’
공공기관 감사가 ‘보은 인사’ 자리가 된 것은, 책임은 적고 대우는 좋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기관장을 감시하는 ‘2인자’이지만 기관장보다 업무 부담도 적고, 세간의 주목도가 훨씬 덜하기 때문이란 얘기다. 연봉은 최소 1억원 초반대이고 3억원이 넘는 경우도 있다. 이번 조사에서 정치권 상임감사 중에 연봉이 1억원이 안 되는 경우는 석탄공사(9677만원) 딱 한 곳뿐이었지만 이 역시 1억원에서 300만원 남짓 모자랄 뿐이었다. 여기엔 판공비와 법인카드 등의 부수적인 혜택은 제외돼 있다. 공기업별로 보면 한국가스안전공사(1억5020만원), 한국남동발전(1억4557만원), 한국가스기술공사(1억3185만원) 등이다. 민주당 보좌관 출신인 김명수 한국남부발전 감사는 지난해 1억5486만원을 받았다.
◇‘낙하산 금지법’조차 무산시키는 정치권
공공기관들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상근감사를 선임하고 있다고 해명한다. 주요 공공기관의 상임감사는 각 기관 임원추천위원회 추천과 공공기관운영위원회 심의·의결을 거친다. 이후 대통령이나 장관이 임명한다. 그러나 업계에선 실질적인 경쟁 과정이 없는 형식상의 절차일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비판 때문에 관련 법인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이런 내용이 담긴 ‘낙하산 방지법’은 19대 국회부터 21대 국회까지 발의와 폐기를 거듭하며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회가 ‘낙하산 금지법’을 막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