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기업인 삼성의 위기론은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삼성 반도체를 이끄는 전영현 DS부문장(부회장)은 8일 “많은 사람이 삼성의 위기를 말한다”며 사과문을 냈다. 본지가 취재한 삼성 전현직 임직원과 전문가들은 기술 리더십 실종과 느슨해진 조직 문화 같은 삼성 내부 문제뿐 아니라, 이공계 인재 부족 등 국내 반도체 경쟁력을 위한 사회 시스템이 후퇴한 것이 겹친 결과라고 지적했다.
IMF 위기 이후 20년 넘게 이어진 ‘의대 광풍(狂風)’ 속 이공계 기피 현상이 ‘인재 제일’을 내건 삼성 위기의 사회적 배경이 됐고, 내부적으로는 ‘이건희 정신’의 실종과 8년간 이어진 사법 리스크, 긴장감이 사라진 조직 문화 등이 위기를 심화했다는 것이다.
삼성의 상징은 ‘초일류’, ‘초격차’였다. 하지만 지금은 삼성 고위 임원들조차 “이제 삼성이 기술적 우위가 있다는 말은 하기 어렵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조직이 됐다. 과거엔 ‘삼성 다닌다’는 것이 큰 자랑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자부심마저 옅어지고 있다.
◇인재 고갈과 내부 위기
전문가들은 국내 대표 기술 기업 삼성의 경쟁력 약화를 불러온 핵심 요인을 고질적 ‘인력난(難)’에서 찾는다. 국내 대기업 중 유일하게 공채를 유지하고 있지만, 실력뿐 아니라 회사에 대한 로열티(충성심)까지 전반적 수준이 과거만 못하다는 것이다. 삼성 사정을 잘 아는 재계 관계자는 “IMF 이후 대량 실업 사태를 목격한 우수 인재들이 의대로 쏠리기 시작해, 이제 공대는 전국 의대를 한 바퀴 돈 다음에 채워진다”며 “그나마도 유학, 글로벌 기업, 네카라쿠배(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민)가 우선순위고 제조업인 삼성은 후순위가 된 지 오래”라고 했다. 삼성은 매달 100만원씩 줘가며 청년 8000여 명에게 무료로 SW(소프트웨어) 교육을 시키고, 반도체 계약 학과까지 만들어 인재 확보에 나서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그나마 전자공학 전공자들도 학교에서 반도체 장비를 제대로 다뤄본 경험이 극히 적다”며 “대학 등록금이 20년 가까이 동결되면서 학교 내 시설 투자가 안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이 20년 넘게 이어지면서 삼성의 내부적 문제들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핵심엔 ‘이건희 정신의 실종’이 있다. 1974년 파산 직전의 반도체 회사를 인수해 미국·일본과 30년 기술 격차를 따라잡겠다고 뛰어드는 무모한 도전은 이제 삼성에 존재하지 않는다. 재계 관계자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과감한 투자보다는 안정적 수익을 추구하는 문화로 바뀌었고, 삼성 문제의 본질은 여기서 비롯된다”고 했다.
임직원들은 몸을 사리고 있다. 삼성의 한 연구개발 분야 임원은 “과거엔 문제가 생기면 이걸 어떻게 해결할지에 역량을 쏟았는데, 요즘은 이게 누구 잘못인지 색출해내서 책임을 무는 데 더 집중한다”며 “그러다 보니 부서 간 이기주의도 커졌다”고 털어놨다.
2016년 국정 농단 사건에서 시작된 ‘사법 리스크’도 삼성의 발목을 잡았다. 경영권 불법 승계 혐의로 총수인 이재용 회장에게 구속, 353일간 수감, 집행유예 석방, 207일간 재수감, 가석방이 이어졌다. 이 회장은 여전히 삼성그룹 부당 합병 및 회계 부정 사건의 2심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역대 정권들은 사법 리스크를 떠안은 삼성에 대규모 투자와 채용 등을 사실상 요구했고 이런 약속들은 현재 삼성에 큰 ‘청구서’로 남아 있다. 지난 2019년 ‘종합 반도체 강국’ 목표를 내세운 문재인 대통령의 방문에 맞춰 삼성이 부랴부랴 발표한 “2030년 시스템반도체 1위” 목표는, 경쟁사인 대만 TSMC를 크게 자극했고 결국 대규모 투자로 이어져 삼성이 경쟁에서 더욱 밀리는 패착이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초일류 삼성’이란 자부심과 조직 문화도 느슨해졌다. 한 연구개발 부문 직원은 “야근이라도 하면 다음 날 늦게 나와야 주 52시간제를 맞출 수 있으니 일이 진행되지 않고, 회사도 MZ 직원들의 눈치를 과도하게 본다”고 했다. 다른 직원은 “사업부 실적만 좋으면 연봉 차이가 크지 않으니 열심히 일하는 대신 무임승차하며 복지만 쏙쏙 빼먹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TSMC는 ‘이건희 정신’으로 삼성 넘어서
삼성이 휘청이는 사이 최대 경쟁자인 대만 TSMC는 ‘이건희 정신’으로 무장한 채 무섭게 뛰어, 2021년 시가총액으로 삼성전자를 넘어섰다. TSMC 창업자인 모리스 창(93)은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 경영권을 이어받은 1987년 회사를 세웠다. 이 회장과의 친분으로 한국의 삼성 반도체 공장을 돌아본 모리스 창은 “메모리를 하려면 자본과 인력이 많이 든다”는 이 회장의 설명에, 메모리 사업 구상을 접고 파운드리에 전념했다. 업계에서 요약하는 ‘스케일 업(규모 확대)’ ‘위기 돌파’ ‘선제적 투자’ 등 모리스 창의 경영 철학은 이건희 회장의 스타일을 빼닮았다. 한 대기업 임원은 “한국 재계에서 창업자 정신이 옅어지는 가운데 창업자 정신으로 무장한 대만과 중국 기업들이 무섭게 한국을 추월하고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와 한국 경제
삼성전자의 위기론에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 때문이다. 지난해 실적을 공시한 우리나라 상위 57대 대기업 매출에서 삼성전자의 비중은 15.5%에 달한다. 임직원 수도 지난해 기준 12만756명으로 국내 대기업 취업자 308만7000명의 약 4%를 차지한다. 수출에서 삼성전자의 역할은 두드러진다. 지난해 한국의 전체 수출은 6327억달러(당시 한화 약 830조원)를 기록했는데 삼성전자의 수출 실적은 149조8545억원으로 전체의 약 18%에 달한다. 핵심 수출 품목은 반도체고 스마트폰과 생활가전 부문의 수출 기여도도 높다.삼성전자가 3분기 잠정 실적을 공시한 8일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359조9779억원을 기록했다. 코스피 상장사 전체 시총(2116조1864억원)의 17%에 해당한다. 최근 주가 하락 전에는 20%대 수준을 유지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