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는 “삼성의 위기는 연구비 공백에 따른 인재 부족, 외부 정치 요인의 관여, 장기 기술 개발보다 단기 실적에 집중하는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라고 했다. 사진은 지난 14일 ‘반도체 패권 탈환을 위한 한국의 과제' 간담회에서 황 교수가 주제 발표를 하는 모습. /장련성 기자

“2000년대 중반 한국 메모리 반도체가 잘나가면서 나타난 현상이 정부가 지원하던 반도체 연구개발(R&D)비를 줄인 것이다. 정부에서 반도체 분야는 성숙 단계라고 판단해 투자를 줄이고 나노·바이오 등 새 분야에 지원을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반도체 기업들 역시 당장 현장에 투입할 인력이 많이 필요해지자, 학부생들을 대학원에 보내 연구개발에 투입하지 말고 빨리 기업으로 보내달라며 이런 분위기에 동조했다.

이런 상황은 정부 연구비에 크게 의존하는 대학들이 반도체 교수 임용을 못 한 배경이기도 하다. 서울대도 거의 15년 이상 반도체 전공 교수를 뽑지 못했다. 반도체 공부하겠다는 학생이 있어도 교수가 없어 받지 못하는 상황이 한참 이어졌다. 지금 와서 삼성은 반도체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그때 벌어졌던 일들의 업보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메모리 호황에 취해 정부 연구비 줄어… 위기의 배경”

황철성(60) 서울대 석좌교수(재료공학부)는 반도체 분야 연구와 교육에 있어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 석학(碩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SCI급 논문 730여 편을 냈고, 배출한 석·박사 제자만 140여 명이다. 최근 ‘삼성 위기’의 배경에 대해 황 교수는 반도체 학계와 인력의 공백 문제를 가장 먼저 거론했다. 다음은 황 교수와의 일문일답.

-반도체 강국을 말하면서 연구개발 투자를 줄이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2015년에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을 했는데 정부의 반도체 분야 연구비가 거의 ‘빵(0)원’이었다. 소장이 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 2019년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의 한국 수출을 제한하는 보복을 하면서 연구비가 다시 살아났지만, 10년 가까이 정부에서 지원하는 반도체 연구비는 거의 없었다. 그 공백이 있다 보니 이제 와서 반도체 교수를 뽑겠다고 해도 그런 인력이 많지 않다. 삼성의 위기에는 이런 대학 반도체 교육과 인재 양성의 붕괴도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기업에서 신입 사원을 가르쳐 쓰면 안 되나.

“과거엔 똑똑한 학생들 뽑아다가 현장에서 열심히 가르치면 될 수도 있었다. 지금은 삼성이 맨 앞에 나가 있으니 그게 아니다. 첨단 기술을 선도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건 반도체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박사급 인재가 할 수 있는 영역이다. 한때 반짝했던 반도체 계약학과도 대부분 의대로 빠져나가고, 삼성을 그만두는 인재들도 자꾸 미국으로 가는 상황에서 결국 인재 부족이 심화된 것이다. 인력이 아래서부터 공급돼야 하는데 그런 구조가 무너진 총체적 난국을 맞고 있다.”

◇”정치가 경영에 관여... 파운드리 갈 길 잃어”

-많은 이들이 ‘삼성의 위기’를 말한다. 외부적 요인도 있다고 보나.

“삼성이 스스로 판단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외부 정치 요인이 관여하는 것도 큰 문제다. 최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투자 건도 그런 사례다. 목표부터 과도했다. 2030년까지 대만 TSMC를 꺾고 1위를 하겠다는데, 연간 15조원 투자하는 삼성이 연간 45조원씩 투자하는 TSMC를 무슨 수로 이기겠나. 그럼 삼성이 아예 파운드리를 투자하지 않는 게 좋았나?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런 목표가 어떤 사업적 판단에 의해 나왔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 정치, 사회적 압력이 들어갔다고 들었다.”

-어떤 압력인가.

“삼성이 당시 국정 농단으로 ‘최순실 말(馬) 사건’에 얽혔던 시기였다. 2019년에 정권 차원에서 시스템 반도체 개발을 화두로 꺼냈다. 그때 수출이 줄고 경제가 안 좋았다. 그러더니 대통령까지 나서 삼성을 찾았고 7나노 웨이퍼에 사인을 했다. 2030년 세계 시스템반도체 1위라는 목표가 그때 나왔다. 그렇게 TSMC를 넘어설 것이란 프로파간다(선전)가 나왔고, 삼성 파운드리가 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

파운드리는 타사의 반도체 설계도를 토대로 제품을 위탁생산해 주는 사업이다. 2019년 1분기 당시 시장 선두였던 TSMC의 점유율은 48%로, 2위 삼성(19%)의 두 배 이상이었다. 그마저도 삼성은 외부 고객이 아닌 내부 제품 생산까지 포함한 수치였다. 그런데 스마트폰, 가전,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다 하면서 추가로 파운드리까지 하는 삼성이, 파운드리로만 30년 외길을 걸어온 글로벌 최강자 TSMC를 꺾겠다고 갑자기 선언한 것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이 선언이 TSMC를 크게 자극해 투자를 늘리는 계기가 됐고 결국 삼성과 격차가 더 벌어지는 결과를 빚어냈다고 평가한다. 올해 1분기 TSMC의 점유율은 62%, 삼성은 11%다.

-삼성 파운드리가 어떤 길을 갔어야 하나.

“삼성 파운드리는 처음부터 TSMC를 이기겠다고 시작했던 게 아니었다. 갤럭시 휴대폰 사업에 공급할 핵심 부품으로서 반도체를 만드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AP(스마트폰의 두뇌 역할 반도체)나 카메라용 이미지 센서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만 집중하다가 갑자기 TSMC를 이겨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기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다. 사회적 압박 때문에 회사가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결과적으로 지금 TSMC를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 같고, (제한된 자원을 파운드리에 분산 투입하다보니) 메모리 경쟁력도 많이 상실되면서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상황이 됐다.”

-삼성이 ‘국민주(株)’가 되다 보니 국민도 우려가 큰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삼성 주가(株價) 하나에 난리가 나는 것 역시 삼성엔 부담이다. 주가가 떨어지면 언론이든, 유튜브든 그 반응이 지나치다고 느낀다. 그런 게 경영자를 알게 모르게 단기 실적에 집착하게 만들 것이다. 삼성 경쟁력의 근본적 문제는 장기 기술 개발보다 단기 실적에 집중하는 데 있는 것 같다. HBM(고대역폭 메모리) 같은 게 대표적이다. 물론 HBM을 축소하겠다는 판단을 한 경영진의 문제도 있지만, 삼성 주가에 개인 투자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역시 문제 풀기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고 본다. "

◇주가에 일희일비… ‘국민株의 굴레’

-삼성의 연구개발(R&D)에 허점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지금 R&D 책임자들이 제 목소리를 못 낸다. 연구소 사장 제안을 인사팀 부장이 안 듣는다고 한다. 회사에는 R&D, 생산 같은 핵심 역량 조직이 있고 지원 부서 같은 보조 역량 조직이 있다. 지금은 보조 역량자들이 핵심 역량자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보나.

“생각해보면 CEO(최고경영자)들 연봉이 너무 센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CEO가 1년만 임기를 연장하면 초고액 연봉이 생긴다. 그렇다 보니 미래 대신 ‘내가 올해 1년만 더’를 생각하게 된다고 본다. 삼성이 R&D 줄이고 모험적인 건 안 하는 분위기가 된 지 한 10년은 된 것 같다는 얘기가 많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석좌교수로, 국내 반도체 분야 최고 석학으로 꼽힌다.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선임연구원 출신으로, 1998년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다.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SCI급 논문 730여 편을 냈고,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을 지냈다. 140여 명의 석·박사 제자들을 배출했고, 정부·기업 자문도 많이 하며 연구와 교육, 현장을 모두 아우른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 석·박사 출신으로 젊은 과학자상(대통령상), 과학의날 유공 국무총리 표창, 인촌상, 강대원상, 경암상, 미국 진공학회 Innovator Award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