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전력은 주택용 전기 요금과 소상공인이 쓰는 일반용 전기 요금을 계속 동결한다고 23일 밝혔다. 다만, 기업이 부담하는 산업용 전기 요금만 24일부터 평균 9.7% 인상하기로 했다. 이달 종료하려던 유류세 인하 조치도 연말까지 두 달 더 연장된다. 전문가 사이에서 “비용 인상 요인이 누적돼도 여론 눈치만 살피는 ‘에너지 포퓰리즘’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정부는 전기 요금 현실화를 국정과제로 내세웠지만, 가정용 전기 요금은 작년 5월 인상 후 1년 6개월째 동결이다. 총선 같은 정치 일정과 물가 상승 우려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전력의 누적 적자는 상반기 기준 41조원에 달하고, 이자만 하루에 126억원씩 매달 3800억원 넘게 내고 있다. 올해 30조원에 달하는 세수 결손이 예상되는 가운데 유류세 인하도 재정 부담만 가중시킨다는 지적이다.
산업용 전기 요금 인상만으로는 한전의 누적 적자와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이번 조치로 한전의 연간 영업이익이 약 4조7000억원 늘어날 전망인데, 1년 이자 비용을 충당할 정도다. 한전이 올해 상반기에 이자로 사용한 비용만 2조2840억원이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중 전기 요금을 한 번도 올리지 않다가 대선이 끝난 2022년 4월 딱 한 번 올렸다. 2013년 이후 9년 만의 인상이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가정용 전기 요금은 OECD 38국 중 35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전기 요금이 오랫동안 동결되면서 한전의 재무구조는 망가졌고, 송배전망 등 전력 인프라 투자도 대거 지연됐다.
이런 상황인데도 여론을 의식해 주택용·일반용 전기 요금을 계속해서 동결하는 것은 포퓰리즘적 행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해마다 무더위로 늘어나는 냉방 수요를 포함해 소상공인과 주택용 전력 사용은 늘고 있다. 한전에 따르면, 올해 1~8월 산업용 전력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4% 하락했지만, 일반용은 2.4%, 주택용은 3.7% 늘었다.
기업용 전기 요금도 OECD 평균보다 저렴하지만, 최근 인공지능(AI) 기술 발달로 데이터센터 수요가 급증한 상황에서 기업에만 전기 요금 부담을 전가하면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번 인상 조치로 삼성전자 등 국내 전력 사용량 상위 20대 기업이 내는 전기 요금은 총 1조2000억원 늘어날 전망이다.
한전은 작년 말 발표한 자구책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지난 5월 창사 이래 두 번째 희망퇴직을 실시했지만, 전체 직원(2만3000여명)의 1%도 안 되는 149명에 불과했다. 자회사인 한전 KDN 지분 20% 매각, 서울 공릉동 인재개발원 부지 매각 등도 수년이 걸릴 전망이다.
유류세 인하 조치도 장기화하고 있다. 최근 중동 정세 불안으로 국제 유가가 들썩이는 상황에서 물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다. 원래 휘발유에는 L당 820원, 경유에는 L당 581원의 유류세가 붙는다. 그런데 정부는 국제 유가가 급등했던 2021년 11월부터 현재까지 약 3년간 11차례에 걸쳐 유류세를 인하하는 조치를 연장했다. 이 역시 재정에 부담을 준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이유로 드는 ‘국제 유가 불안’이 언제 해결될지 막연하다는 비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