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1월 신문에 실린 육군본부의 ‘해외 유학 기술 요원 모집’ 공고. 해외 출국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 1972년 상반기에 바로 9개월간 도미(渡美) 기술 교육을 시켜준다는 공고에 전국 공학도가 구름같이 몰렸다. ‘공과대학 기계과 전공, 군필자, 기계 분야 경력 5년’에 더해 ‘영어 회화 및 전문 기술 분야 영문 원서 해득 가능자’ 등 까다로운 조건이었음에도 약 1800명이 모여 27명이 선발됐다. 다만, 미국 어디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는 ‘극비’였다.
1972년 초 노스웨스트항공 여객기를 타고 하와이를 거쳐 미국을 향하기 직전에야 이들은 임무를 알게 됐다. ‘M16 소총 제조 공장 도미 훈련기사’가 이들의 공식 직함이었다. 소총 하나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없던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 손으로 우리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자주국방을 강조하며 1971년 국방부 조병창(造兵廠)을 착공했다.
당시 한국의 정밀기계공업은 같은 부품 10개도 계속 만들지 못하고 불량이 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공장 준공에 맞춰 1년 안에 미국에서 M16 모든 기술을 배워와 국내 생산을 준비해야 했다. 목표는 ‘연간 소총 10만정 생산’.
지난 10일 당시 도미 기사단 부단장 역할을 맡았던 황익남(85) 예비역 대령을 만났다. 황 전 대령은 “이름도 생소한 코네티컷주에 도착해 아파트를 처음 봤다”며 “공장으로 출근해야 하는데 운전면허가 없어서 몇 명이 부랴부랴 공터에서 ‘속성 운전 교육’을 받은 게 우리의 첫 기술 수업이었다”고 했다.
이후 1년여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도미 기사들은 부산 조병창에서 1973년 초도 물량 수천 정을 생산했고, 이듬해 불가능한 목표로 보였던 연간 소총 10만정을 ‘도미 교육’ 2년 만에 성공적으로 생산했다. 최종 목표였던 60만정 생산도 1년 9개월이나 단축했다. 6·25 전쟁에서 구형 M-1 소총으로 싸우며 소총 한 자루 만들 수 없던 한국에서 ‘K방산’이 시작한 순간이었다.
◇”후진국이 무슨 총을 만드느냐”
도미 기사는 미국 콜트사(社)에서 기술을 배워와 부산에서 M16 국내 생산을 시작하며 ‘K방산’과 자주국방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육군사관학교 18기 출신 보병 장교로 1970년 월남전에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황 전 대령도 선발됐다. 도미 기사단에 군(軍) 출신도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서울대 기계공학과 위탁교육을 다녀온 그가 발탁됐다. 황 전 대령은 “2년 전 월남에서 이렇게 멋진 총이 있나 하면서 사용했던 M16을 이제 내가 미국에 직접 가서 제작 기술을 배운다니 믿기지 않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황 전 대령과 도미 기사들은 생전 처음 가보는 하와이를 경유해 뉴욕을 거쳐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 도착했다. 숙소로 지급받은 아파트가 신기했던 것도 잠시, 차량으로 20분 정도 걸리는 출퇴근이 문제였다. 모두 운전면허가 없어 부랴부랴 몇 명이 면허를 땄다. 아시아 남성 여럿이 검은 양복에 서류 가방을 들고 다니면 현지인들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한국은 후진국인데 무슨 총을 만들겠느냐”는 비아냥도 나왔다. 이런 순간 든든한 응원군이 있었다. 하트퍼드 한인회였다. 고(故) 송자 연세대 총장 등 교민들이 이들을 집으로 초청해 한식을 먹여주고, 주변 관광도 시켜줬다고 한다.
1년이 안 되는 단기 교육. 하지만 우리 정부와 콜트사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도미 기사들이 집요하게 달라붙자 콜트사 기술자들도 ‘맨투맨’으로 기술을 전수했다. 처음에는 의견 충돌도 잦았다. 당시 M16 주요 부품은 126개였다. 도미 기사들이 126개 기술을 모두 알려달라고 하자 콜트에선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며 “핵심 부품 몇 개만 우리가 만들고 나머지는 협력사가 만든다”고 했다. 당시 한국은 협력사 개념도 없었다. 콜트의 하도급 회사가 있는 미국 서부와 중부까지 뿔뿔이 흩어져 기술을 배웠다.
◇10개만 만들어도 불량 나오던 시절, 소총 60만정 생산
황 전 대령은 “당시 1970년대엔 한국의 정밀기계공업은 대량생산 개념이 없어 조악했다”며 “장인이 부품 1~2개를 만들면 기가 막히게 품질이 좋았지만, 여러 사람이 손을 대는 순간 10개 이상부터는 불량이 나왔다”고 했다. 이 때문에 도미 기사 훈련 때부터 ‘불량품 없애기’에 집착했다고 한다. 당시 콜트의 불량률은 6% 수준이었지만 도미 기사들의 목표는 ‘불량률 제로’였다.
황 전 대령은 “당시 어려운 나라 상황에서 불량률을 줄이는 게 무조건 최선이란 생각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집요하게 배워 귀국한 이들에게 내려진 새로운 임무는 1974년부터 6년간, 매년 10만정씩 모두 60만정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저작권료 등을 감안한 콜트사와 계약 조건이 60만정이었다. 그런데 불과 4년 3개월 만인 1978년 3월 60만정을 조기 생산했다. 당시 월남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자주국방에 대한 절박감이 더 높아졌고, 이 때문에 ‘속도전’을 냈던 것이다. 그는 “2교대를 해가며 소총을 생산하고 정부 요청에 따라 M60 기관총, M203 유탄발사기 등 무기도 개발해야 했다”며 “모두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보람 있던 순간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황 전 대령은 이후 조병창 기술·생산부장, 부창장까지 맡아 소총 공장 민영화까지 맡았다. 이후 국방품질검사소 창설 요원, 미 군수무관 파견 등 방산 업무를 담당하다 1989년 예편했다. 현재도 국내 기업의 해외 방산 수출 자문 등을 맡고 있다. 그는 “올해 국군의 날 퍼레이드에 등장한 한국 방산 제품들을 보면서 50여 년 전 고생했던 순간들이 생생히 떠올랐다”며 “K방산은 이제 도약을 시작하는 단계인데 첨단 무기는 비축이 되면 금세 포화 시장이 되기 때문에 차세대 무기 개발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