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서울 중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안동만 전 ADD 소장이 국내 첫 미사일인 백곰 모형(왼쪽)과, 백곰을 토대로 개발된 현무 모형(오른쪽) 앞에서 각 무기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기병 기자

1975년 미국 LA 인근의 작은 도시 호손(Hawthorne). 한 아파트에 한국인 3명이 모여 복사기 한 대를 둔 채 여러 종류의 책자를 복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대지미사일을 개발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최초의 탄도미사일 ‘백곰’을 개발하던 국방과학연구소(ADD) 연구원들이었다.

20~40대 안팎의 연구원 10여 명은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의 노스럽 항공과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 등을 만든 방산기업 맥도널 더글러스(현 보잉사에 흡수) 연구 시설 등에서 기술 연수 중이었다. 이들이 복사하던 것은 미사일 등 항공 무기와 관련된 노스럽 항공 도서관에 있던 각종 논문과 맥도널사에서 제공한 교육용 교재였다. 당시 미사일은커녕 전차도 만든 적 없던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미사일 및 항공기 설계 등이 담긴 희귀한 자료가 그곳에 즐비했다. 맥도널 측이 교육 때 열람은 시켜주지만 외부 반출을 금지한 것들도 있었다.

그래픽=양인성

20대 중반이었던 안동만(75) 전 ADD 소장(현 한서대학교 석좌교수)이 그중 한 사람이었다. 서울대 항공공학과,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등을 거쳐 ADD에 합류한 그는 백곰 미사일의 기체 설계 등을 맡은 개발 주역 중 한 명이다. 안 전 소장은 “귀국할 때 복사한 자료 대부분을 갖고 들어왔는데 사과 상자 크기 기준 10박스가 넘더라”면서 “당시 절박했던 우리에게 백곰 개발은 물론, 훗날 다른 미사일 개발 등에 두고두고 참고할 소중한 자료가 됐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이 1978년 9월 26일, 충남 서해안의 안흥시험장에서 솟아오른 백곰 미사일이 정확하게 표적을 맞히는 성공으로 이어졌다. 지난 22일 서울 도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안 전 소장은 “백곰 발사 성공은 가난하고 기술도 부족했던 우리나라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일군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했다. 그는 백곰 개발을 포함해 ADD에서 30년 넘게 일한 항공 무기 분야 전문가로, 지난 2005년 ADD 역사상 처음으로 연구원 출신 소장에도 올랐다.

◇가난과 기술 부족을 극복한 성과

본격적으로 백곰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73년 전후였다. 개발팀은 당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미국 미사일 ‘나이키 허큘리스’를 토대로 미사일을 만들기로 했다. 이 미사일을 만든 맥도널 더글러스가 약 160만달러를 받고 기초 설계를 가르쳐주기로 했다. 이 회사는 2000만달러를 주면 핵심 설계와 시제품 제작 등까지 다 해준다고 제안했지만, 거부했다고 한다. 안 전 소장은 “너무 큰돈인 데다 사서 쓰는 기술로는 우리 실력을 기를 수 없다는 게 당시 ADD 생각이어서 직접 개발에 도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백곰’ 발사 지켜보는 박정희 前대통령 -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8년 9월 26일 충남 안흥시험장에서 ‘백곰’ 시험 발사를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500kg짜리 탄두를 포함한 5000kg 미사일을 180km 밖 목표를 향해 정확하게 날리는 기술은 1970년대 대한민국에선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는 우리 제조업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1973년 당시 포항제철이 고로에서 처음 쇳물을 쏟아냈고, 삼성전자는 흑백 TV를 생산했던 시절이었다. 1975년에야 국내엔 국산 자동차 포니가 처음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사일을 개발하려고 ADD에는 심문택 소장과 이경서 박사 등의 지휘 아래 내로라하는 최고 인재 수십 명이 모였다. 안 전 소장도 이때 합류해, 해외 기술 연수도 떠난 것이다. 기초 기술을 배웠더라도 이를 우리 실정에 맞춰 구현하는 것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특히 아직 미성숙 단계였던 제조업이 문제였다.

예컨대 알루미늄으로 기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 제조업에선 알루미늄이 생소한 소재라 이를 제대로 가공해본 곳이 거의 없었다. 경운기를 만들던 회사나,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를 수소문해 찾아서 일을 맡겼다. 거기서도 네모난 알루미늄판을 원형으로 잘라내야 하는데, 장비가 없어 테두리를 따라 드릴로 구멍을 여러 개 뚫는 방식을 쓰는 등 시행착오가 많았다.

안 전 소장은 “기술 연구뿐만 아니라 기체 등을 만드는 제작까지도 연구원들이 어떻게 할지 궁리해서 기업들에 알려주는 일의 반복이었다”면서 “그러다 보니 단순히 미사일을 쏘는 데 그치지 않고 항공, 전자뿐만 아니라 금속 가공 등 많은 기초 산업에서 많은 사람이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래픽=양인성

◇최고 인재에 대한 파격 대우

역경을 딛고 미사일을 쏘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최고 인재들의 피나는 노력뿐만 아니라, 파격적인 대우도 큰 역할을 했다. 안 전 소장 등에 따르면 1970년대 초 삼성 같은 대기업 월급이 2만~3만원 할 때, ADD는 연구원들에게 갑절에 이르는 5만원 안팎을 줘서 1등 신랑감 대우를 받을 때였다고 한다. 해외여행은커녕 여권만 발급받는 것도 까다로운 시기에, ADD에서는 기술 연수차 수십 명을 선진국에 파견할 수 있었다.

안 전 소장은 “나라를 지키는 기술을 개발한다는 차원에서 수백만 달러 규모 사업도 ADD 내부 부서장이 결재하면 한국은행에서 처리해주는 등 권한을 많이 줬던 시기였다”면서 “인재들이 먹고살 걱정 없이 최고 대우를 해줬고 이들이 다른 생각 않고 기술 개발에 몰두했기에 불가능한 일을 해냈던 것”이라고 말했다.

첫 연구원 출신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을 역임하며 K방산을 이끌었던 안동만 박사가 2024년 10월 22일 서울 퇴계로 한 사무실에서 한국방위산업의 역사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전기병 기자

그는 “지금은 어떤가요?”라고 되물었다. 과거 기술 자립 노력의 결과로 K방산이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현장에서 체감하는 시장 환경은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파격적인 지원을 해줬던 당시와 달리 한쪽에서는 관료들의 지나친 감사와 문책 등으로 ADD 연구원들이 압박을 받고 자율성을 잃고 있다”면서 “지금부터 첨단 방산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와 연구원 사기 진작, 중소 전문 업체를 육성해야 우리 방산이 성공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전 소장은 또 “지금의 방산 수출은 가성비가 좋기 때문인데, 미래는 가격만으로는 경쟁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술력을 키우는 것에 더 투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