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감소와 의대 쏠림 현상 등으로 반도체 인력난이 심화되는 가운데, 반도체 업계에서 연구개발(R&D) 인력의 근로 시간 규제를 풀어 달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 경제의 중심 축인 반도체 산업이 고질적인 기술 인재 부족에다 주 52시간제까지 발목을 잡고 있어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산업 분야에 획일적으로 적용한 '주 52시간' 근로제가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한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 이상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특정 직군의 근로시간 규제를 면제하는 '화이트칼라 면제 제도'를 반도체 연구개발 분야에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SK하이닉스 청주 반도체 공장 내부 모습. /SK하이닉스

3일 재계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업계는 연구개발 인력의 근로 시간 제한을 없애는 ‘한국형 화이트칼라 면제 제도(White Collar Exemption)’를 정부와 국회가 협의 중인 ‘반도체 특별법’을 통해 도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화이트칼라 면제 제도는 미국이 1938년 도입한 것으로, 고위 관리직과 전문직, 고소득자는 근로 시간 규제 대상에서 제외한다. 업무 특성상 근로 시간을 기준으로 업무 성과를 평가하는 것이 부적합한 직종이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적용 대상은 주급 684달러(약 94만원) 이상의 고위 관리직 및 행정·전문직, 연 소득 10만7432달러(약 1억4800만원) 이상의 고소득 근로자다.

일본도 지난 2018년 비슷한 제도를 도입했다. 고소득 전문직을 노동 시간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고도(高度) 프로페셔널’ 제도다. 금융상품개발, 애널리스트, 신상품 연구개발 등 생산직이 아닌 근로자 중 연 1075만엔(약 9700만원) 이상의 고소득자는 근로 시간 규제에서 제외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현재의 근로 시간 규제는 과거 제조업 중심 산업 구조에서 근로자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취지로 도입된 것인데 전문직·고소득자까지 획일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미국처럼 고소득자에 대한 초과근무 수당을 효율화할 수 있다면, 근로자 간 임금 격차를 줄이고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낮춰 추가 채용과 근로 조건 개선 여력이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 반도체 업계는 근로 시간 규제로 연구개발에 한계가 있음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 사내 취업규칙에 따르면, 반도체 R&D 인력은 1개월 단위 탄력근로제를 적용받고 있다. 매주 52시간을 맞추지 않더라도, 한 달 평균으로 주당 52시간 근무만 맞추면 된다. SK하이닉스 R&D 인력도 필요시 2~4주 범위 내에서 주 평균 52시간을 맞추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밤을 새워 기술을 개발하는 경쟁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일부 핵심 연구원에 한해 주 68시간 근무가 가능하나 극히 일부에 한정돼 있어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반도체 업계의 설명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이미 미국과 대만에서는 최첨단 반도체 기술을 먼저 선보이기 위해 필요할 경우엔 주 7일 근무까지 불사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다만 한국에서는 장시간 근로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고, 추가 보상 없이 근로 시간만 늘어나는 것에 대한 직원들의 반발도 커 좀처럼 제도 정착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실제로 게임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김병관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9년 근로소득 상위 3% 근로자는 근로 시간 기준 적용을 제외하는 법을 발의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연구개발은 ‘지식’과 ‘시간’의 결과물”이라며 “연구개발에 몰두하는 1분 1초가 누적돼 글로벌 경쟁사와의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에서, 최적화된 근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도록 기업과 정부 모두 머리를 맞대야 할 때”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