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2일 오전 9시 49분. 북한이 장거리 로켓 ‘은하 3호’를 기습적으로 발사했다. 이 로켓을 가장 먼저 포착한 건 서해에서 임무 수행 중이던 우리 해군의 첫 이지스함 세종대왕함이었다. 세종대왕함은 고성능 레이더로 약 9분간 로켓 궤도를 추적했고, 2·3단과 분리된 1단 로켓의 낙하 위치까지 정확히 찾아냈다. 덕분에 우리 군은 바다에 떠 있는 로켓 잔해물을 수거해 분석할 수 있었다. 이지스함의 탐지 능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강력한 레이더로 1000㎞ 떨어진 거리에서도 적 항공기나 미사일을 발견해 요격할 수 있는 이지스함은 ‘꿈의 함정’ ‘신의 방패’로 불린다. 우리나라의 첫 이지스함인 세종대왕함은 2007년 진수, 2008년 취역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일본·스페인·노르웨이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였다.
세종대왕함의 설계와 건조 작업을 이끈 김정환(70) 전 HD현대중공업 사장은 경기고 재학 시절 해군사관학교 견학을 갔다가 한 생도에게 “우리나라 군함은 2차 대전 때 미군이 쓰다 넘긴 고물뿐”이라는 말을 듣고 함정 개발의 꿈을 꿨다. 1977년 입사 후 회사 선배들이 모두 “호황인 상선 사업부로 오라”고 권유할 때도 35년 함정 외길을 걸어 한국의 첫 호위함인 울산함부터 첫 이지스함 세종대왕함까지 만들어냈다.
◇사용료 700억원 대신 독자 설계에 도전
국내에서 우리 힘으로 이지스함을 만들어보자는 논의가 시작된 1990년대 후반이다. 이지스 시스템을 보유한 미국 록히드마틴에서 설계도를 사 와 그대로 건조만 할지, 우리가 직접 설계할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도면 구매 가격은 5000만달러(약 700억원).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말고 사 오는 게 안전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김 전 사장은 “호위함, 잠수함, 구축함까지 만든 기술력으로 이지스함도 충분히 설계할 수 있다”고 회사와 해군을 설득했다.
이지스 시스템은 인체로 비유하면 일종의 두뇌다. 이 두뇌는 가져오되 손과 발이 될 무기·장비, 이를 잇는 신경망은 국내에서 만들기로 한 것이다. 김 전 사장은 “미국의 설계 도면을 쓰면 함정에 배치할 무기까지 모두 미국 것을 따라 써야 하지만, 자체 설계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세종대왕함 주요 장비 120여 종 가운데 미사일 수직 발사대 등 90여 종이 국산품이다. 함대지 크루즈미사일 ‘해룡’, 함대함 유도탄 ‘해성’, 대잠 미사일 ‘홍상어’ 등 국산 무기도 대거 탑재했다.
이지스함에 국산 무기가 호환되도록 하는 데는 난관이 많았다. 김 전 사장은 “쉽게 말하면 영어를 하는 장비와 한국어를 하는 무기를 연동하기 위해 둘에 서로 언어를 가르치거나, 혹은 통역을 둬야 했던 것”이라고 했다. 설계팀은 장비 공급 업체들을 수없이 오가며 연동 체계를 조율했다. 록히드마틴에 가서 막바지 연동 작업을 할 때는 미국에서 회의 직후 회사에 이메일을 보내면 한국에선 밤을 새워서라도 연구해 답을 보내줬다고 한다. 그는 “하루 만에 수정된 부분을 들고 회의에 들어가니 록히드마틴에서 ‘다른 나라는 한 달 후에나 답이 온다’며 놀라더라”고 했다.
핵심 장비인 이지스 레이더 타워를 선체에 탑재하는 작업도 쉽지 않았다. 작은 오차가 수백km 떨어진 표적 근처에선 수백m 오차로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은 주로 밤에 이뤄졌다. 김 전 사장은 “햇빛 때문에 미세하게 휘어지는 오차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야간 작업만 4개월 가까이 했다”고 말했다.
◇최신 기능 찾아 전시회, 해외 설계사무소 직접 돌아
김 전 사장은 “보통 군에서 함정을 요구하고 설계를 거쳐 실제 취역하기까지 10년이 걸린다”며 “바다에 떠다니는 다른 나라 함정을 참고해 만들면 기능이 10년은 뒤처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사장은 이런 격차를 줄이기 위해 해외에서 열리는 학회와 전시회, 설계 사무소 곳곳에 발품을 팔았다.
세종대왕함에는 적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스텔스(은폐) 기능과 배의 일부가 폭발해도 가라앉지 않는 폭발강화격벽 기능이 들어가 있다. 모두 당시 막 취역한 함정에만 반영된 최신 기능이었다. 김 전 사장은 “2001년쯤에 미국 설계 회사에 갔더니 ‘요즘 트렌드는 단순히 포에 안 맞는 게 아니라 맞아도 안 가라앉게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고 했다. 함정에 폭발을 견딜 수 있는 격벽을 설치해 한쪽에 어뢰를 맞더라도 함정 전체로 피해가 번지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미사일을, 얼마나 견딜 정도여야 하는지 같은 세부 사항은 물론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와 기준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북한·중국·러시아 등 우리나라를 공격할 가능성 있는 나라 무기를 연구해 우리나라 함정에 맞는 기준을 만들고, 이에 기초해 폭발을 견디는 기능을 넣은 것이다.
스텔스 기능도 이런 발품의 결과였다. 스텔스는 레이더에 잘 걸리지 않는 특수 재료를 쓰거나, 배에서 나는 열·소음을 줄이는 기술로 함정이 최대한 적에 발견되지 않게 만든 것이다. 김 전 사장은 스텔스 기능을 넣기 위해 미국 업체와 계약하며 “한국 연구소나 대학과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스텔스 기능이 보편화할 거라고 보고 기술 이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텔스 기능은 세종대왕함보다 앞서 2003년 취역한 충무공이순신함에서 첫선을 보였고, 이후 세종대왕함에 전면적으로 적용됐다.
◇미국도 놀란 기술력, 이제 K함정 세계로
2010년 7월 하와이 인근 해역에서 벌어진 환태평양훈련(RIMPAC·림팩).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7국, 함정 19척이 모여든 이 훈련에서 세종대왕함은 ‘탑건함’ 명칭을 받았다. 7.2km 떨어진 표적을 향해 각국 함정이 5인치 함포를 5발씩 쏘는 대회가 열렸는데, 훈련에 처음으로 참가한 세종대왕함이 우승자가 된 것이다. 김 전 사장은 “당시 미 해군 이지스함 함장이 우리 세종대왕함을 돌아보곤 ‘우리 배 2대를 줄 테니 그쪽 배 한 대와 맞바꾸자’고 농담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K함정은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이미 뉴질랜드·베네수엘라 등에 함정 총 6척을 인도했고, 필리핀에 보낼 8척을 건조 중이다. 지난 4월에는 페루에서 4척을 수주했다. 김 전 사장은 “함정 수출은 조선소에서 주관하지만, 각종 시운전과 외국 해군 승조원 훈련 등에 해군, 방위사업청, 국방과학연구소 등의 협력이 필요하고 다 함께 뛰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지스함
미 해군이 함대 방어용으로 만든 ‘이지스 시스템’을 탑재한 함정을 뜻한다. 최첨단 레이더로 1000㎞ 거리에 있는 항공기와 미사일을 탐지·추적하고, 이를 파괴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북한 탄도탄 추적용으로 주로 쓰인다. 이지스란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가 딸 아테나에게 준 방패 이름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