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코즐로두이 원전단지 - 현대건설은 지난 4일(현지 시각) 불가리아 원자력공사와 대형 원전 2기의 ‘설계 계약’을 체결했다고 5일 밝혔다. 현대건설의 EPC(설계·조달·시공) 수주액은 전체 사업비 20조원 중 절반인 10조원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1987년과 1991년 가동을 시작한 코즐로두이 5·6호기. /코즐로두이 원전

세계적으로 수요가 폭발하는 원전(原電) 시장을 두고, 한·미 양국이 원전 수출 파트너십의 첫발을 내디뎠다. 한국의 시공 및 설비 제작 능력에 미국의 외교력과 원천 기술을 더해 세계 원전 수출 시장 공략에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한·미 양국 정부가 원전 수출에 공조하면서, 체코 원전 등을 둘러싼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한국수력원자력 간 분쟁 해결에도 ‘청신호’가 켜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외교부는 5일 미국 에너지부 및 국무부와 ‘한·미 원자력 협력 원칙에 관한 기관 간 약정(MOU)’에 가서명했다고 밝혔다. 양국은 이날 “양국 민간 원자력 협력 의지를 발판으로 향후 양국 산업에 수십억달러 규모 경제적 기회가 창출되고 제조업 분야 일자리 수만개가 생겨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르면 연내 정식 서명이 이뤄질 전망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과거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출 땐 미국산 부품·설비를 채택한 수준에 그쳤던 것과 달리 이번 정부 간 MOU를 바탕으로 양국은 수주 단계부터 공동 참여 등 협력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 각국에서 ‘원전 르네상스’가 본격화하는 가운데 ‘팀 코러스(KORUS·Korea+US)’가 원전 수출 시장 공략에 공동으로 나서는 것이다. 세계원자력협회(WNA)에 따르면 현재 세계 각국이 건설 계획을 확정했거나 검토 중인 원전은 총 431기로 현재 가동 중인 원전(439기)에 육박한다.

한편, 현대건설은 지난 4일(현지 시각) 총 사업비 20조원 규모의 불가리아 코즐로두이 원전 건설의 시공사 자격으로 ‘설계 계약’을 불가리아 원자력공사와 체결했다고 이날 밝혔다. 현대건설의 이번 원전 사업의 EPC(설계·조달·시공) 수주액은 전체 사업비 20조원 중 절반인 10조원으로 추정된다. UAE 바라카, 체코 신규 원전 수주에 이어 대박 수주가 이어진 것이다.

2009년 20조원 규모 UAE 바라카 원전, 지난 7월 24조원 규모 체코 신규 원전에 이어 세계 원전 시장에서 양국의 시너지를 바탕으로 조(兆) 단위 신규 수주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커진다. 이날 최종 계약을 맺은 현대건설도 고리 1·2호기부터 UAE 바라카 1~4호기, 최근 착공한 신한울 3·4호기까지 우리나라가 짓는 대형 원전 36기 중 24기 건설에 참여하며 쌓은 시공 능력이 수주 원동력이 됐다.

◇팀 코러스, 러시아·중국 맞서 시장 공략

한·미 양국의 ‘팀 코러스’ 결성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원전 수출 시장에서 한미가 힘을 합쳐 러시아와 중국에 맞선다는 의미가 담겼다는 평가다. 체코 신규 원전 수주전에서 프랑스전력공사(EDF), 미국 웨스팅하우스를 누른 우리나라의 ‘온 타임 온 버짓(On Time On Budget)’ 능력이 미국의 외교력, 원천 기술 등과 결합하며 그동안 러시아와 중국이 휩쓸어온 세계 원전 시장을 공략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사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이 자국에서도 원전 건설·운영을 중단하고, 우리나라까지 ‘탈원전’ 정책이 추진되면서 세계 원전 시장은 러시아와 중국 판이었다. 두 나라는 자금력을 무기로 각국에 저리 융자를 뿌리며 원전 수주를 독식했다. 한국원전수출산업협회에 따르면 2019~2023년 5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착공한 원전 38기 중 러시아와 중국이 참여하지 않은 경우는 단 1기뿐이었다. 러시아는 자국 내 6기에 더해 튀르키예·인도·이집트·중국에 13기를 수출했고, 중국은 자국 내에서만 18기를 지었다.

그래픽=양진경

하지만 2022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최근 들어 인공지능(AI) 확산으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화두로 떠오르며 ‘원전 르네상스’가 도래하자 한·미 양국이 원전 수출 시장 공략을 위해 손을 잡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문주현 단국대 교수는 “우리가 앞으로 원전 수출 시장에서 러시아·중국과 맞서기 위해선 외교력이 강한 미국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며 “원전 인력이 고령화되고, 공급망이 취약한 미국으로서도 우리와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수출 협력을 통해 시너지는 확대되고, 과실도 양국이 함께 나눌 것으로 기대된다. 현대건설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컨소시엄을 꾸려 참여한 불가리아 코즐로두이 원전도 총 사업비 20조원 가운데 현대건설의 몫이 10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번 불가리아 코즐로두이 원전도 웨스팅하우스가 과거 협력사였던 벡텔 등 미국 업체보다 현대건설의 시공 능력을 높이 평가해 협력하게 됐다고 들었다”며 “원전 건설 능력에서 이제 우리나라를 따라잡을 서방 세계 나라는 없다”고 말했다.

◇웨스팅하우스·한수원 분쟁 해결도 기대

양국 정부가 한·미 동맹에 기반해 원전 수출 통제에 협력하기로 하면서, 미 웨스팅하우스와 한수원 간 분쟁 해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체코 신규 원전 수주전에서 탈락한 웨스팅하우스가 체코 반독점 당국에 이의를 제기하고, 미국 현지에서 원천 기술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며 발목을 잡지만, 양국 정부가 원전 수출을 위해 밀착하면서 웨스팅하우스 측의 태도 변화가 기대된다는 것이다.

특히 체코 정부가 웨스팅하우스와 EDF의 이의 제기를 기각하며, 한수원과 계약에 의지를 보이는 상황에서 웨스팅하우스가 과도하게 한수원에 어깃장을 놓지는 못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한 원전 업계 관계자는 “웨스팅하우스 내부에서도 한수원 발목 잡기에 대해 회사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노동석 한국에너지정보문화재단 센터장은 “이번 MOU는 체코 원전 계약에 대한 불안감을 없앴다는 의미가 있다”며 “한·미 양국이 원전 수출 시장에서 결합하면 상승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