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신세계그룹은 정유경(52) 총괄사장이 ㈜신세계 회장으로 승진했다고 발표했다. 회장 승진에 더해 이날 신세계그룹이 백화점 부문과 이마트 부문으로 계열 분리하겠다고 공식 선언하면서 정유경 회장이 더욱 주목받게 됐다. 그가 분리해 독립하는 백화점 부문의 자산은 재계 27위에 해당한다.
정유경 회장은 인사 당일 조용히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신세계백화점 기획전략본부에 백화점과 신세계인터내셔날의 뷰티 사업을 총괄하는 뷰티 전략 태스크포스(TF)팀을 신설한 것이다. 유통업계에서는 신세계백화점 부문의 독립 경영을 선언한 정유경 회장이 글로벌 뷰티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정유경 회장에게 이목이 쏠린 것은 그가 신세계그룹의 뿌리를 이어받아 독립 경영에 나섰기 때문이다. 신세계그룹은 지난 1997년 이명희 총괄회장이 삼성그룹에서 백화점 두 곳(본점·영등포점)과 조선호텔을 들고나와 독립한 게 시작이다. 업계에선 정유경 회장이 사양산업으로 여겨졌던 백화점 부문을 10여 년간 경영하면서 이 총괄회장에게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유경 회장은 어떤 경영 스타일을 갖고 있는 것일까.
◇“무조건 숫자로 달성해야”
신세계 임원들은 정유경 회장이 누구보다 숫자를 강조한다고 말한다. 신세계의 한 임원은 “정 회장이 ‘1번은 숫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무조건 숫자로 달성해야 한다는 의미다. 장기적인 시각도 결국 단기 성과에서 나온다고 보더라”고 했다.
정유경 회장이 독립 경영을 하게 된 신세계백화점 부문에는 신세계백화점에 더해 면세점(신세계디에프), 패션·뷰티(신세계인터내셔날), 부동산 개발(신세계센트럴시티), 가구(신세계까사) 등이 속해 있다. 백화점뿐 아니라 신세계디에프, 신세계인터내셔날, 라이브쇼핑 등도 작년 매출 1조원을 넘겼다.
정유경 회장이 ㈜신세계 총괄사장에 오른 2015년 유통가에서는 “백화점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나왔다. 인구 감소, 지역 경제 침체로 백화점을 비롯한 오프라인 유통가의 미래가 어둡다는 전망이 쏟아지던 때다. 정유경 회장은 다점포 전략 대신 지역 1위 점포를 만드는 이른바 ‘랜드마크 전략’을 택했다. 대표적 사례가 2016년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증축 리뉴얼이다. 2017년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롯데백화점 본점을 제치고 업계 1위로 올라섰고, 작년에는 매출 3조원을 돌파했다. ㈜신세계의 실적(연결 기준)은 2015년 총매출 5조523억원에서 작년 11조1322억원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2621억원에서 6398억원으로 증가했다. 신세계백화점 부문 전체의 총 거래 규모(관리 매출)를 보면 2015년 8조1645억원에서 작년 18조7557억원으로 늘었다. 올해는 백화점이 상반기까지 사상 최대 매출을 이어가고 있다.
정유경 회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은 그의 경영 스타일로 추진력을 꼽는다. 정유경 회장이 2015년 총괄사장에 오른 뒤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2016년 12월 대구신세계 오픈식이 유일하다. 대구점은 오픈 1년 만에 대구 지역 매출 1등 백화점이 됐고, 4년 만인 2021년 당시 국내 백화점 중 가장 짧은 기간에 연 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5층 전체를 명품관으로 만들고 식당가를 테마파크처럼 꾸몄을 뿐 아니라 지역 최초 아쿠아리움과 콘서트홀, 대형 갤러리 등을 집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유경 회장이 대구신세계 오픈식을 택한 건 그가 가장 공을 들인 점포였기 때문이다. 대구신세계는 동대구역복합환승센터와 함께 조성된 건물로, 1~4층은 공간의 절반을 복합 환승 센터로 이용하고 있다. 당시 업계에서는 “명품은 반드시 백화점 1~2층에 있어야 한다”는 게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정유경 회장은 ‘온전히 백화점 공간으로 쓸 수 있는 5층에 명품을 배치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주요 임원들이 “수도권이 아닌 백화점에, 1층이 아닌 5층에 명품관을 조성하면 브랜드 유치가 불가능하다”고 반박했지만, 정 회장은 결단을 내리고 추진했다. 기존 공식대로 1~2층에 명품관을 만들면 소비자들이 좁은 공간에서 명품 쇼핑을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결국 대구신세계는 전례 없이 5층 전체를 명품관으로 꾸몄다. 업계에서 ‘3대 명품’으로 불리는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도 모두 입점시켰다.
◇뷰티로 글로벌 사업 가속화
정유경 회장은 글로벌 인맥을 사업에 적극 활용한다. 정 회장은 조르조 아르마니, 릭 오웬스 등의 패션 디자이너와 루이비통·샤넬 플래그십 스토어를 만든 건축가 피터 마리노 등과 교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명품 브랜드 크롬하츠의 공동 설립자들과는 수시로 패션 트렌드에 대한 의견을 공유한다고 한다. 크롬하츠는 현재 국내에서 신세계백화점에만 입점해 있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정 회장의 인맥은) 신세계인터내셔날의 해외 브랜드 비즈니스로 이어지며 신사업의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정유경 회장은 지난 2012년 비디비치를 시작으로 스위스퍼펙션, 어뮤즈 등 화장품 브랜드를 잇따라 인수했다. 회장 승진과 함께 뷰티 TF를 신설한 건 내수뿐 아니라 글로벌화에 시동을 거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신세계백화점 부문이 고급화 전략을 통해 내수 시장의 한계와 이커머스의 공세에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정유경 회장은 임원들에게 “디지털이 부상해도 보편적인 인간의 감성을 충족하는 오프라인 경험은 영원할 것”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신세계백화점 부문은 2028년을 목표로 광주종합버스터미널 부지에 미래형 복합 개발 단지를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정유경 회장이 ‘우리가 가진 자산의 부가가치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한다”며 “오프라인이 줄 수 있는 신세계만의 가치를 지켜나갈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