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당선인이 첫번째 정상 통화에서 한국의 조선업 협력을 원한다고 말한 것은, 그의 실용적 사고에 대한 힌트를 주는 장면입니다. 한국 기업의 미국 내 위상은 8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올라갔고, 미국의 새로운 공급망이나 제조업 재건 모두 한국 기업 도움없이는 쉽지 않은 상태입니다. 위기 속에서도 우리가 기회를 찾아낼 수 있다고 봅니다.”(여한구 전 통상교섭본부장)
내년 1월 새롭게 출범하는 ‘트럼프 2기 정부’의 경제 통상 정책을 놓고 역대(歷代) 통상교섭본부장 4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한국경제인협회가 11일 한국의 통상 정책을 지휘했던 김종훈, 박태호, 유명희, 여한구 등 전 본부장 네 명을 초청해 좌담회를 가진 것이다.
참석자들은 “트럼프는 이전에 이단아로 평가됐지만 주류로 편입됐다는 것이 이번 선거의 특징”이라며 “취임 100일 이내에 강력하고 속도감있는 ‘트럼프표’ 경제 통상 정책이 추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한구 전 본부장(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트럼프 2기는 무역적자 축소, 미 제조업 부흥, 미·중 패권경쟁 우위 확보라는 3대 목표 아래 관세 등 통상정책을 핵심수단으로 사용해 ‘America First(아메리카 퍼스트)’ 비전 실현을 위한 드라이브를 걸 것”이라고 내다봤다.
◇10% 보편관세? 인플레로 美 경제도 망가져… 쉽지 않을 것
이날 참석자들은 트럼프 당선인이 추진 중인 ‘보편관세’를 가장 먼저 논의했다. 전(全) 수입품에 10%의 보편적 기본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에는 60%의 관세를 부과한다는 것이 트럼프 후보 캠페인의 관세 정책이다. 법인세, 소득세를 감면하고 세수 부족은 관세로 충당한다는 구상이다.
박태호 전 본부장(법무법인 광장 국제통상연구원장)은 “트럼프는 ‘관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말할만큼, 옛날부터 ‘관세맨’으로 불렸던 사람”이라며 “다만 관세를 10% 올리면 인플레가 금방 와 미국 경제가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공화당 사람들이 이렇게 경제가 망가지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트럼프 1기를 복기해보면, 관세를 올리되 상당한 유예 조치를 통해 실질적으로는 인상 효과가 많이 나타나지 않게 할 가능성이 있다”며 “다만 중국에는 60% 관세를 매기면서 압박 메시지를 보내 빅딜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한미FTA 협상 수석대표를 지낸 김종훈 전 본부장(전 국회의원)도 “미국은 한국을 비롯해 25개국과 FTA를 체결한 상태이므로, 보편관세 도입을 통해 기존 FTA를 폐기하거나 전면 수정하는 것은 대외관계 전반과 미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미국 입장에서도 쉬운 선택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 IRA·반도체 보조금, 폐기보다는 축소될 듯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법에 따른 보조금 정책에 대해 참석자들은 폐기보다는 대체로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유명희 전 본부장(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은 “IRA는 폐기보다는 보조금을 축소하거나, 요건을 강화하거나 차별적으로 미국 기업을 우선해서 주는 쪽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며 “IRA로 인한 수혜의 80%가 공화당 주(州)로 갔고, 올해 공화당 의원 18명이 IRA 폐기에 반대하는 서한을 냈는데 이 중 3분의 2 이상이 당선된만큼 폐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 기업들이 투자한 지역구의 의원들을 중심으로 우리 요구사항이 선제적으로 잘 반영될 수 있도록 통상 외교를 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종훈 전 본부장은 “미국 공화당은 친기업이고, 미국 우선주의인만큼 미국 기업에 우선적으로 보조금이 가도록 조정될 가능성이 높고 보조금도 확대보다는 축소될 것”이라며 “우리 배터리 기업의 경우엔 전기차도 있지만 전기저장장치(ESS)처럼 큰 시장을 공략하고, 사업 재편도 함께 생각하면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태호 전 본부장은 “우리가 위축될 필요는 없고, 투자를 더 한다거나 하는 방법을 통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며 “주저하기보다는 기업 차원에서 과감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자동차가 ‘타깃’ 될 듯… 관세 인상 혹은 수출 자율규제 가능성
참석자들은 트럼프 2기 정부가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한국이 흑자를 내고 있는 자동차 산업을 겨냥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여한구 전 본부장은 “미국의 자동차 관세는 2.5%인데 EU는 10%, 우리나라는 8%로 민주·공화당을 막론하고 자동차 관세가 너무 낮다는 인식을 갖고있다”며 “트럼프 2기에서 자동차의 2.5% 관세를 높이려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유명희 전 본부장은 “트럼프 정부가 양자관계를 판단하는 척도는 무역적자”라며 “무역적자국 8위인 우리는 트럼프 정부의 1순위 고려대상은 아니겠지만, 중국, 멕시코 등 일부 국가에 이어 타깃 국가가 될 수 있는만큼 차분하면서도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종훈 전 본부장은 “미국이 관세를 건드리기 보다는 수출 자율 규제(export-restraint) 정책을 쓸 수도 있다”고 했다. 수출국이 자발적으로 수출을 일정 수준 이하로 자제하는 정책이다. 그는 “민간 기업들은 정보가 가장 중요한만큼 조직을 잘 만들어서 안테나를 세운 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