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인협회 김창범(맨 앞줄 발표자) 상근부회장과 국내 주요 16개 기업 사장단이 21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한국 경제 재도약을 위한 주요 기업 사장단 긴급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와 같은 어려움이 지속될 경우, 국내 경제가 자칫 헤어나기 힘든 늪에 빠질 수 있다”고 했다. /연합뉴스

‘천막으로 한정된 야영텐트의 소재 다양화’, ‘서바이벌게임장에서 총기의 탄속(彈速·발사 속도) 개선’, ‘3㎏ 이하 가정용 저울 형식승인 없이 판매 가능’.

21일 정부가 발표한 기업 현장 규제 불편 해소 방안 13개 과제 중 ‘기업 활동’ 분야에 담긴 내용이다. 정부는 “올해 4월부터 여러 경제 단체들과 릴레이 간담회를 하고, 관련 기업을 직접 만나 현장의 생생한 애로 사항을 듣고 주요 선진국 사례를 참고해 개선 방안을 마련했다”며 “다수의 기업, 국민이 효과를 체감할 수 있는 과제들”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재계에선 “규제 개선 노력은 감사하지만, 당장 개선이 시급한 규제들과는 동떨어진 ‘찔끔 규제’ 풀기”라는 평가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국내 주요 16개 기업 사장단이 이례적으로 한자리에 모여 정부와 정치권을 향해 “경제 살리기 입법과 규제 개혁에 힘써 달라”는 긴급 성명을 발표한 날이었다.

심각한 경기 침체와 대외 불확실성에 시달리는 기업들은 정부가 굵직굵직한 규제 개선에 나서면서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핵심 산업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길 바라는데, 여전히 정부와 온도차가 크다는 것이다.

그래픽=양인성

◇다수 기업 체감 어려운 ‘찔끔 규제’ 개선

실제로 이날 정부가 발표한 13대 규제 개선 과제 중 기업 활동에 해당하는 7가지 모두 다수 기업이 효과를 체감하기 어려운 분야이다. 첫째로 내세운 ‘식품위생분야 외국인근로자 현장투입 기간 단축’은 식당, 식품 공장 등에 취업하려는 외국인 근로자에 해당하는 규제다. 기존엔 외국인 등록증이 나와야 법정 건강진단을 받을 수 있어 입국 후 현장 투입까지 수주(週)가 걸렸는데, 이젠 등록증 없이 여권만으로 검진을 받도록 해 기간을 단축하겠다는 것이다. 전국의 미활용 폐교(廢校)에 대한 무상 대부 조건을 완화하겠다는 것도 학교들을 지역 명물로 재탄생시키겠다는 취지다. 이 밖에 소상공인이나 렌터카 사업자들이 본인 소유 차량에 타사(他社) 광고를 해 수익을 낼 수 있도록 허용하고, 특허권 기간 연장을 위한 심사 제도를 개선하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전체 13개 과제 중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와 관련한 두 개의 규제 개선이 포함됐는데 신규 설비 인허가 기간 단축 등이 골자로, 현재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반도체 업계가 시급하게 개선을 호소해온 규제와는 거리가 있다.

◇기업들, “‘발등의 불’ 규제부터 풀어야”

재계는 정부의 규제 개선 노력 자체는 환영하면서도, 현재 기업들이 시급하게 느끼는 규제들이 우선적으로 처리될 필요가 있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이날 주요 기업 사장단들이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한 것은 최근 국회에서 논의 중인 상법 개정안 등 지배구조 관련 규제였다.

반도체 업계에선 핵심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의 주 52시간 예외 적용, 송전 선로 계획조차 확정 못 하는 전력 수급 문제, 글로벌 경쟁국에 크게 뒤처진 직접 보조금 문제 등을 ‘가시’처럼 여기고 있다. 골목 상권 침해를 막는다는 취지로 12년째 지속되고 있는 대형 마트 의무 휴업 역시 실효성이 떨어지는 대표 규제로 꼽힌다. ‘미래 산업의 쌀’로 불리는 빅데이터 산업이 발전하려면 개인 정보 규제가 완화돼야 한다는 건의도 지속되고 있다. 주요 기업들의 새 먹거리인 AI, 클라우드와 관련해서도 이를 국가 전략 기술로 지정해 세제 혜택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재계 관계자는 “경기 불황 속 기업들이 과감한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마중물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올초 전국 515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기업들이 가장 큰 부담을 느끼는 규제는 중대재해처벌법 등 안전규제(43.3%·이하 중복 응답), 주 52시간제 등 근로시간 규제(35.5%), 최저임금제도(21%), 최고세율이 24%에 달하는 법인세(18.1%), 탄소 중립 등 환경 규제(15%) 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