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7월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고등교육재단 집무실에서 최종현(가운데) SK 선대회장이 해외 유학을 떠나는 장학생들과 대화하고 있다. 그는 출국을 앞둔 장학생을 집으로 불러 함께 식사하거나 해외 출장 때 여유가 있으면 현지에서 유학 중인 학생들을 만나 격려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고등교육재단

십년수목 백년수인(十年樹木 百年樹人). ‘10년을 내다보며 나무를 심고, 100년을 내다보면서 사람을 심는다’는 이 말을 신념으로 여겼던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이 만든 비영리 공익법인 ‘한국고등교육재단’이 26일 50주년을 맞는다. 이날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에서 미래 인재 콘퍼런스 등 관련 행사가 잇따라 열리는 것을 계기로 반세기에 걸친 최종현 선대 회장의 인재 양성의 뜻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1974년 11월 26일 최 선대 회장이 사재 5540만원을 털어 시작한 이 재단은 반세기 동안 5128명의 인재를 지원했다. 939명을 해외 유학 보냈고 박사 학위를 딴 인재만도 952명에 이른다. 그가 재단을 만들면서 세운 원칙은 단 하나였다. 한국과 인류의 미래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라면 파격적으로 지원한다는 것. 좌우 이념이나 연구 분야, 출신 지역 등 다른 요소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순수한 인재의 산실을 만든 것이다.

특히 최 선대 회장은 나무를 심고 키우는 마음으로 인재들을 대했다. 지금이 아닌 후대에 결실을 보기 위해 사람을 키운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무와 인재의 공통점으로, 천천히 자라고, 가꿀수록 잘 자라며, 오래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장학생들에게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유학 후 SK(당시 선경) 관련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같은 조건은 하나도 없었다. 또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용 학문보다는 사회과학, 순수 자연과학 등에서 공부하는 인재들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우리 사회 밑바탕의 지성(知性)을 끌어올려야 대한민국이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난 10월 열린 한국고등교육재단 홈커밍데이 행사에서 최태원(맨 오른쪽) SK그룹 회장이 참석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SK

최종현 선대 회장에 이어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998년부터 재단 이사장을 맡으며, 두 사람이 재단을 통해 50년간 지원한 인재들은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거목(巨木)으로 자랐다. 재단의 첫 해외 유학 장학생은 민주주의를 연구한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였다. 한국인 최초 미국 하버드대 종신교수가 된 박홍근 하버드대 화학 및 물리학과 석좌교수, 미국 예일대의 첫 아시아인 학장인 천명우 심리학과 교수, 2020년 노벨화학상 후보에 올랐던 현택환 서울대 공과대학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도 재단의 도움을 받았다.

또 국내 양대 사학으로 꼽히는 연세대와 고려대 총장도 재단이 나란히 배출했다. 김용학 전 연세대 총장과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현 태재대 총장)이 그들이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을 맡았던 성경륭 상지대 총장, 당시 노동부 장관이었던 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도 재단 장학생이다. 현직으로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재단 지원을 받았다.

실력만 보고 장학생을 선발한 것도 유명하다. 학생의 경제 상황이나 사회적 지위, 지역 배분 등의 요소는 배제한 것이다. 지원 규모는 상당했다. 재단 출범 당시 해외 유학생에게 학비와 생활비로 5년간 1인당 총 4만~5만달러의 파격적인 장학금을 줬다. 당시 선경 신입 사원의 25년 치 월급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당시 선경 내부에서도 반대가 컸었지만 최 선대 회장은 오히려 “이왕이면 최고의 장학금으로 합시다. 돈 좀 아낀다고 뭘 하겠소. 돈 걱정이 없어야 24시간 공부에 전념할 수 있지 않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IMF 외환 위기가 왔을 때도 다른 비용을 아껴서라도 장학금은 모두 제대로 지급했다고 한다. 지금도 연 7만5000달러를 5년간 준다.

최 선대 회장은 “회사 홍보를 위한 것 아니다”라며 외부로 드러나는 것은 꺼렸다. 재단 이름에도 선경이나 SK 같은 단어를 못 쓰게 했다. SK그룹 관계자는 “재단 이름을 봐도 장학금 출처를 알 수 없으니, 한때 사이비 종교 단체나 중앙정보부 같은 데서 돈을 주는 것 아니냐는 말도 대학가에 돌았다고 한다”고 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적극적으로 재단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지난 10월 열린 재단 장학생들의 홈커밍데이에서 “경영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사람이라는 선대 회장님 뜻을 이어받아, 다음 50년에도 도움을 받은 분들이 재능이나 지식을 다시 사회에 돌려주는 선순환 고리를 만들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