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무역과 통상은 물론 산업, 에너지, 환경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현 바이든 정부와 크게 다른 정책을 예고하면서 국내 경제계와 산업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본지는 세계 84국의 경제 현장에서 활동하는 코트라(KOTRA) 무역관 129곳에 전수 설문조사를 실시, 트럼프 2기 행정부 정책의 영향과 우리 수출의 나아갈 길, 주재국의 대처 방안 등에 대해 들어봤다. 설문조사 응답은 조사 대상 80%에 달하는 65국, 100곳의 무역관·지역본부가 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으로 타격이 예상되는 중국과 미국 시장을 보완할 수출 시장으로는 아세안(ASEAN)이 꼽혔다. 설문에 응한 코트라 무역관 100곳 중 절반인 50곳이 우리나라가 앞으로 주력해야 할 1순위 수출 시장으로 ‘아세안’을 지목했다.

한때 전체 우리나라 수출의 30%에 육박하던 중국 수출 비율은 미국의 대중(對中) 제재가 이어지며 20% 아래로 떨어진 상황이다. 미중 갈등 속에서 자동차와 반도체 등을 중심으로 급성장한 대미 수출 또한 트럼프 재등장 이후 보편 관세 도입, 현지 생산 확대 등으로 타격을 입을 경우 우리 수출은 1, 2위 시장에서 크게 줄어들 것이란 우려가 크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 등이 진출해 우리의 수출 기지 역할을 해온 베트남을 비롯해 최근 제조업을 강화하는 동남아 각국이 대중 수출을 대신할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조상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이미 우리의 주요 수출 시장인 베트남 외에도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각국은 최근 제조업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며 “소재·부품·장비 등 중간재 부문에 경쟁력을 가진 우리 수출 구조를 감안하면 동남아 시장으로 수출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의균

아세안 국가가 당장 중국 시장을 대체하기는 어렵더라도 점차 줄어드는 중국으로의 수출을 흡수하는 측면에서 기대된다는 진단이 나온다. 미얀마, 라오스 등 동남아에서도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딘 국가는 인건비를 비롯한 생산 비용이 크게 낮아 새로운 중간재 시장의 블루오션이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상호 한국경제인협회 본부장은 “미국이 달러 기축통화를 유지하려는 상황에서 중국을 압박하면서 동남아 국가들까지 압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동남아를 새로운 기지로 활용하는 방안도 기대된다”고 했다.

한편 미중 양국으로의 수출이 줄어들 것이란 전망에도, 미국과 중국 시장을 여전히 놓쳐서는 안 된다는 답변도 많았다. 우리나라가 주력할 1순위 시장으로 미국을 선택한 무역관은 25곳, 중국을 선택한 무역관은 11곳으로 각각 2위와 3위를 나타냈다.

◇트럼프 시대 어떤 수출 품목이 떠오르나

트럼프 2기 정부 출범으로 반도체·자동차 등 우리 주력 수출 품목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나오는 품목도 많았다.

‘트럼프 2기 정부에서 한국의 15대 수출 품목 가운데 가장 수혜를 입을 것으로 기대되는 품목’을 물은 결과, 선박(조선업)과 반도체, 석유화학이 많은 답을 받았다. 선박에는 무역관 43곳의 선택이 몰렸다. 트럼프 당선인이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에서 한국의 군함과 선박 건조 능력을 거론하며 MRO(유지·보수·정비)를 포함한 한국 조선업의 협력을 요청한 데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답변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특히 석유와 LNG(액화천연가스) 수출을 통한 ‘에너지 지배’ ‘에너지 패권’을 전면에 내세운 트럼프 정부의 정책 드라이브가 이어지며 LNG 수송선 및 LPG(액화석유가스) 선박과 해양플랜트 등의 수주 확대도 기대된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트럼프가 화석연료 확대를 언급한 만큼 한국이 기술력에서 월등한 LNG선과 LPG선 등의 발주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우리 수출 1위 품목인 반도체에 대한 기대도 많았다. 무역관 15곳이 수혜가 기대된다고 답했다. 미국이 중국산 범용 제품의 수입을 제한할 경우 국산 반도체 수출에 숨통이 트일 것이란 기대가 커진 것이다. 미국이 반도체·AI(인공지능)·양자 등 첨단산업 공급망 규제를 강화하면 저가 공세를 펼치는 중국산 D램 등을 대신해 한국산 제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수 있고, 중장기적으로는 중국에 추격을 허용하고 있는 HBM(고대역폭메모리반도체) 등 고부가가치 제품에서 기술 초격차를 더 유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최근 몇 년 동안 사상 최악의 불황에 시달리는 석유화학이 기대된다는 답변도 많았다. 석유화학을 1순위로 꼽은 무역관은 9곳, 2순위로 꼽은 곳도 16곳이나 됐다. 석유화학업계는 코로나 직후 수요가 급증하며 2021년 호황을 누렸지만, 이후 글로벌 수요 감소와 중국발 공급과잉, 중국의 자급률 확대로 어려움이 심화하고 있다. 정부 주도로 TF까지 조직하며 사업 구조 개편을 논의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 있지만, 트럼프 2기의 에너지 수출 확대와 대중 압박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평중 한국석유화학협회 본부장은 “트럼프 2기의 에너지 수출로 유가가 내려가면 원가 부담이 줄어들며 우리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중국은 러시아와 이란 등에서 할인한 원유를 수입해 만든 저가 석유화학 제품을 아시아 등에 뿌리며 시장을 장악해 왔다. 하지만 미국산 원유 수출 확대로 원가 경쟁력을 찾고, 미국을 필두로 주요국들이 중국산 저가 제품에 대한 무역 장벽을 높이면 국산 제품의 수출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2기에서 가장 타격을 입을 품목’ 설문에선 자동차와 이차전지가 각각 35표와 33표를 받아 1, 2위에 올랐다. 트럼프 당선인이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을 없애겠다고 밝히고, 현지 생산을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국내 자동차와 배터리 기업들은 현지 생산을 확대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현대차가 조지아에 공장을 신설한 것과 같이 기업별로는 대응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가는 수출 물량에는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수혜 업종 2위에 오른 반도체는 트럼프 당선인의 ‘반도체 관세’ 공약 등에 대한 우려가 커지며, 19표로 피해 업종에서도 3위에 올랐다.

◇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각국 무역 장벽도 높아질 전망

‘트럼프의 보호무역 확대에 따라 주재국의 무역 장벽도 같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절반이 넘는 55곳 무역관이 ‘그럴 것’이라고 응답했다. 트럼프 2기가 쏘아 올린 보호무역주의가 전 세계로 확대될 것이라는 것이다. 4분의 3에 이르는 무역관장들은 전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 심화는 대다수 국가의 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도 답했다. 허윤 서강대 교수는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 초반부터 수십 년간 세계 경제는 세밀하게 분업화를 이뤄왔다”며 “보호무역주의 심화에 따른 글로벌 가치 사슬 균열은 각국이 비용 부담을 늘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예상되는 경제 정책 중 무엇이 주재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는 45곳이 ‘보편 관세’를 들었고, 25곳은 ‘중국산 제품에 대한 고율 관세에 따른 영향’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