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후 경남 사천 KAI 본사 내 활주로에서 이동규 수석 조종사가 초음속 전투기 ‘KF-21′을 타고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다. /KAI

지난해 1월 17일 오후 2시 58분 경남 사천 공항. 순수 국산 기술로 만든 첫 초음속 전투기 ‘KF-21(보라매)’ 시제기(試製機) 1호가 남해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17분쯤 후 시제기는 고도 약 4만피트(1만2200m)를 비행하며 음속(마하 1.0·시속 1224㎞)을 돌파했다. 6개월간 80여 회 비행으로 조금씩 속도를 높여 초음속에 근접하다가 결국 처음으로 초음속 비행에 성공한 것이다. K전투기가 음속을 넘어선 역사적 순간이었다. 초음속 전투기는 아음속(음속 이하)보다 세밀한 동체 설계가 필요하고, 첨단 장비도 갖춰야 하는 만큼 개발 자체가 어렵다.

이날 조종간을 잡은 이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소속 23년 경력 시험비행 조종사 이동규(57) 수석. 2001년부터 경공격기 ‘KA-1(훈련기 KT-1의 개량형)’, 초음속 고등 훈련기 ‘T-50’, 다목적 전투기 ‘FA-50’ 등을 2000회 이상 시험비행하며 K전투기 역사를 함께한 베테랑이다. 이 수석은 “작은 실수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 게 시험비행이란 생각으로 조종간을 잡아왔다”며 “수조 원을 투자한 KF-21의 완벽을 위해 시험비행 전 시뮬레이터(비행 모의 장치)에서 수없이 연습을 거듭했다”고 했다.

2023년 1월 17일 한국형 전투기 KF-21 '보라매'가 초음속 비행하고 있다. /방위사업청

시험비행 조종사는 ‘일반 조종사는 할 필요도 없고 하지도 않는 비행’을 한다. 예컨대, 속도를 거의 ‘0′에 가깝게 줄여 동체가 균형을 잃게 한 후 다시 속도를 올렸을 때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본다. 엔진이 과열돼 꺼야 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공중에서 엔진을 껐다 켜기도 하고, 항공기를 지상 3000m 상공에서 순간적으로 150~300m까지 하강시켜 ‘자동 상승 장치’가 작동하는지 확인하기도 한다. 실제 전투 상황에서 비행기를 몰 조종사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의 안전을 담보로 비행하는 셈이다. 하나의 전투기가 만들어지기까지 이런 시험비행을 2000번 넘게 거듭하고, 이들의 시험 결과는 고스란히 개발 과정에 반영돼 완성도를 높인다. 국산 훈련기·전투기를 독자 개발한 ‘하늘의 K방산’ 신화 뒤에는 이들의 위험을 무릅쓴 비행이 있었던 것이다.

◇전투기 개발 뒤엔 2000번 시험비행

20일 오후 경남 사천 KAI 본사에서 만난 이 수석은 이날 오전에도 시험비행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마치 난기류에 빠진 것처럼 비행기에 인위적으로 진동을 주고, 기체가 잘 흡수하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KF-21은 이런 시험비행을 2026년까지 총 2000여 회 거듭하게 된다.

1990년부터 공군 전투조종사로 근무한 이 수석은 2000년 시험비행 조종사 임무에 지원했다. 그는 “진급에 좋은 자리도, 인기 있는 자리도 아니었지만 비행기 개발 과정에 참여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후 1년간 영국 시험비행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항공기에 탑재되는 각종 전자 장비와 비행시험 기법을 배우고 훈련기·전투기·수송기 등 20여 종의 비행기를 하나하나 몰았다. 그는 “한 기종을 배우고 비행하고 분석하는 과정이 쉴 틈 없이 반복돼 매일 밤을 새워야 할 정도였다”고 했다.

KAI 격납고에서 정비 중인 KF-21 시제기. /KAI

이후 귀국해 공군 제52시험평가전대에서 시험비행을 하다 KAI로 옮긴 게 2005년. 전역 당시 민항기로 진로를 바꿀까도 고민했지만 “국가 지원으로 시험비행 조종사가 된 만큼 군용기 개발 업무를 계속하는 게 맞다고 봤다”고 했다. 이 수석은 “시험비행 조종사는 아무도 안 타본 비행기를 가장 먼저 타야 하기 때문에 지금도 최신 기술·기종이 나올 때마다 공부한다”고 했다. 미국 록히드마틴, 영국 BAE 같은 글로벌 방산 업체가 방문할 때면 따로 최신 전자 장비에 대한 설명을 구하기도 한다.

23년간 비행기의 각종 ‘처음’을 책임져 온 만큼 아찔한 순간도 많았다. 지난 2005년 5월 남해 상공에서 T-50 저고도 초음속 비행 시험을 할 때의 일이다. 낮은 고도에서 초음속은 기술적으로 더 어려운데 엔진 추력을 최대치로 높이는 과정에서 갑자기 엔진이 뚝 하고 멈췄다. 겨우 엔진 재시동에 성공해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이 수석은 “내가 테스트 중 실수를 할까 걱정될 뿐 사고가 날까 봐 두려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개발 엔지니어부터 현장 정비사까지 동료들과 그들이 해온 작업을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에 20년 넘게 시험비행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무장 투하 시험 중인 KF-21. /KAI

◇한 달간 사막서 비행하며 세일즈도

KAI 시험비행 조종사는 개발자이자 영업맨이기도 하다. 그는 “개발 과정에서 조종석 디스플레이에 어떤 정보를 크게 보이게 할 지부터, 조종간의 민감도를 얼마나 높일지 등 조종사 입장에서 의견을 전달한다”고 했다. 2006년엔 사막의 한 국가로 날아가 한 달간 T-50을 몰았다. 당시 T-50 수출을 위해 공을 들이던 중동 국가에서 “사막기후에도 운용이 가능한지 테스트해 보고 싶다”고 요청해 옆좌석에 현지 공군을 태우고 비행했다.

이 수석은 “최종적으로 수출은 실패했고 어찌 보면 무리한 요구였지만 당시엔 첫 수출을 해내야 한다는 의지가 그만큼 컸다”고 했다. 외국에서 우리 항공기를 둘러보러 온 공군 관계자를 태울 땐 눈치껏 ‘이런 기능을 원하는구나’ 파악하고 KAI 개발팀에 전달해 주기도 한다.

가장 잊지 못할 순간 중 하나는 2013년 9월 인도네시아행이었다. 2011년 수출 계약을 맺은 ‘T-50’ 16대를 넉 달에 걸쳐 직접 비행해 인도했다. 일명 ‘페리’라고 불리는 납품 방식으로 “성능이 이만큼 좋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분해 후 화물기로 운송하는 대신 이 방식을 택했다. 사천 비행장에서 대만(중간 기착지), 인도네시아로 이어지는 항공길을 날아 도착한 순간 T-50에 대한 자부심은 더 커졌다.

20일 경남 사천 KAI 본사 내 활주로에서 이동규 수석조종사가 KF-21 시제1호기 앞에 서 있다. / KAI

이 수석은 KAI에서 은퇴할 때까지 시험비행을 계속하는 게 목표다. 그는 “우리나라가 KT-1부터 KF-21까지 쉬지 않고 항공기를 개발해 온 덕에 감사하게도 계속해서 시험비행을 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항공 개발 사업 투자가 이어져 시험비행 노하우가 이어졌으면 한다”고 했다.

그래픽=김성규

☞시험비행 조종사

새로 개발하는 항공기를 시험·평가하는 전문 조종사. 개발 단계에선 시제기(試製機)를 몰며 성능을 시험하고, 개발 완료 후엔 양산 항공기의 첫 비행을 하며 기능을 점검한다. 일반 조종사들은 할 필요도 없고, 하지도 않는 비행을 한다. 일부러 통제 불능 상태, 극단의 상황을 만들어 군용기 등이 설계한 대로 복원되는지를 시험한다. 1980년대 말 공군에서 선발하기 시작했고, 한국항공우주산업(KAI)도 2001년부터 비행시험팀을 운영 중이다. 현재 공군에 20여명, KAI에 24명의 조종사가 있다. 비행 경력과 조종 실력은 물론 비행역학·항공전자 같은 이론도 잘 알아야 해 선발 후 1년가량의 교육을 거친다. 이들의 시험비행 결과는 고스란히 비행기 개발 과정에 반영돼 완성도를 높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