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우리나라 핵심 산업 생산 기지가 몰려 있는 충남과 경기 남부 등에 전기를 공급할 핵심 송배전망인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가 마침내 준공됐다. 40km에 불과한 거리이지만 첫 계획 당시 준공 시점으로부터는 12년 6개월, 사업에 착수한 때로 따지면 21년 9개월 만이다. 지역 주민의 반발과 지방자치단체의 님비(Not in my backyard·우리 뒷마당은 안 된다)에 더해 중앙정부의 안일함, 사업자인 한국전력의 무기력까지 겹치며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비판이 나온다. AI(인공지능)의 확산과 전기차 보급,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 등에 따라 송배전망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지만, 건설 여건은 나날이 악화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8일 국내 최장기 송전망 지연 사업인 345kV(킬로볼트) 규모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가 전력 공급을 개시했다고 밝혔다. 해당 사업은 2003년 계획 수립 당시 2012년 6월 준공을 목표했지만, 주민 반발 등으로 2014년에야 공사를 시작했다. 이후에도 농작물 훼손, 철새 영향 등의 이유가 이어지며 공사는 멈추기 일쑤였다. 준공 시기는 6차례 밀렸고, 12년(150개월) 지각 준공된 것이다. 국내 송배전망 건설 사상 역대 최장 지연 기록이다.
송배전망 공사 지연은 북당진~신탕정만의 일이 아니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인근 당진화력발전소에서 신송산변전소를 잇는 345kV 선로가 90개월 지연되는 것을 비롯해 주요 송배전망 31건 중 26건이 계획보다 늦게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송배전망 건설에 어려움이 커지며 북당진-신탕정의 기록을 깨는 공사가 나올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충남 당진시 송악읍에서 아산시 탕정면까지 41.3km를 잇는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는 2003년 제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수립 당시부터 지난해 발표한 제10차 전기본까지 20년 동안 빠짐없이 포함된 이른바 ‘화석’ 같은 송전선로다. 인근 태안군에 있는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아산 탕정에 있는 세계 최대 규모 디스플레이 단지 등으로 보내기 위해 추진됐다. 하지만 사업 착수 후 11년이 지난 2014년에야 공사는 시작됐고, 착공 후에도 계속 일정이 밀리며 공사에만 10년이 걸렸다.
◇주민 반발에 바닷가 접하는 구간으로 변경
당초 당진시 중심을 지날 예정이었던 송전선로는 주민들의 반발 속에 아산만에 접한 송악읍과 신평면, 우강면을 잇는 선로로 바뀌었다. 철탑을 더 세우고, 송전선이 길어지면서 건설비는 더 늘었다. 2010년대 초 ‘밀양 송전탑 사태’가 전국적인 관심을 끌자 당진 지역 117개 단체는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강하게 반발했다. 2013년 당진 시민 1300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대규모 집회에선 송전 철탑 모형을 부수고 불태우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산 구간부터 공사가 시작됐지만, 반발이 심한 당진에서는 3년 뒤인 2017년에서야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면 단위별로 100억원이 넘는 기금과 지원 사업비를 약속한 뒤였다. 사람을 피해 선로를 바닷가로 돌렸지만 이번에는 ‘철새’가 문제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에 송전탑을 설치하려고 했지만, 대책위에서는 겨울철에 삽교호를 찾는 철새의 피해를 막기 위해 섬과 섬 사이에 송전탑을 설치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송전탑 위치를 애초 계획한 곳에서 옮기고 나서야 공사는 재개됐다.
철탑을 세우면서 추수를 앞둔 벼를 훼손하자 주민들은 “자식처럼 키운 농민 심정을 헤아리지 않았다”며 어깃장을 놨고, “당진시의 입구인 서해대교 경관을 해칠 수 없다”는 여론에 해저로 전선을 매설해야 했다. 예산은 0.5km 구간에 400억원 가까이 늘었다.
지방자치단체도 인허가 등을 내세워 발목을 잡았다. 당진시는 환경단체의 요청에 월동 기간(12~3월) 중에는 공사 중지를 명령했고, 송전탑 부지로 들어가는 진입로 사용을 막고, 각종 건설 자재를 쌓지도 못하게 하면서 사실상 공사를 막았다.
◇직접 손실만 1조 이상
이렇게 송배전망 건설이 지연되면서 입은 손실은 1조원이 넘는다. 서부발전은 2016년과 2017년 차례로 1GW급 태안화력 9·10호기를 가동하기 시작했지만, 해당 선로 건설이 늦어지며 사실상 1.5개는 놀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한전의 부담이 됐다. 한전 관계자는 “값싼 석탄화력발전 대신 LNG(액화천연가스) 발전소가 돌아가면서 한전이 비싸게 전기를 산 비용만 지난 8년 동안 1조1727억원”이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LNG 가격이 급등한 2022년에는 한 해에만 4000억원 넘게 손해를 입었다”고 했다. 손양훈 인천대 명예교수는 “전기 요금 인상에 따른 기업과 가정의 손해, 각종 사회적인 비용 등 간접적인 손해를 더하면 손실액은 훨씬 커질 것”이라고 했다.
발전소와 송전선로가 대거 설치된 곳에 추가로 신규 선로를 지으면서도 안일하게 접근한 정부나 국책 사업에 대한 책임 의식 없이 10년 넘게 질질 끈 한전 등의 총체적인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전면 지중(地中)화라는 무리한 요구로 건설을 막은 지역 주민들도 비판을 받는다. 345kV 송전선로 기준, 지상 선로와 지중 선로의 비용 차이는 1km당 225억8000만원에 달한다. 만약 41.3km 중 지상 구간인 35km를 지중화했다면 7900억원을 더 투입해야 했다.
박종배 건국대 교수는 “불과 40km 길이 송전선 건설에 21년이 걸린 것은 보상금을 최대한 많이 받으려는 지역 주민들의 노골적인 시간 끌기, 손을 놓다시피 한 한전, 주민들의 눈치를 본 지자체, 갈등을 중재할 의지 없이 방관한 정부 등 모두의 책임”이라며 “한전과 지역 주민, 지자체 간의 적극적인 협상과 타결이 가능하도록 총체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