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 이후 매 정권(5년)마다 성장률이 1%포인트씩 감소하면서, 이번 윤석열 정부에는 연평균 성장률이 1%대에 머무르는 ‘저성장 터널’ 진입을 앞두고 있다. 성장의 핵심 동력은 산업이다. 하지만 한국 산업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에 빠져들고 있다.
1일 본지가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와 공동으로 최근 10년간 한·중 8대(大) 주력 산업의 세계 수출 시장 점유율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이미 ‘중국 블랙홀’의 영향권에 들어선 한국 경제의 현주소가 여실히 드러났다. 한국은 지난 10년간 반도체·조선·철강 등 7개 부문에서 중국에 수출 점유율을 추월당하거나, 선두 중국과의 격차를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크게 벌어졌다. 유일하게 석유화학에서만 1%포인트 수준의 선두를 간신히 지켰다.
국가 3대 첨단 전략 산업인 반도체·디스플레이·이차전지는 지난 2013년만 해도 중국의 세계 시장 수출 점유율이 한국의 2배 수준이었지만, 10년 새 이 격차는 적게는 3배에서 많게는 8배 수준까지 크게 벌어졌다. 중국의 빠른 수출 점유율 성장뿐 아니라 한국이 오히려 뒷걸음질친 결과 때문이었다.
조선·철강·자동차·석유화학 등 한국 경제를 지탱해온 주력 산업군 역시 일제히 부진을 보였다. 한국이 우위였던 선박과 자동차 수출은 10년 새 중국에 추월당했고, 중국의 저가(低價)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철강은 중국과 점유율 격차가 10%포인트 넘게 벌어지며 생존 위기에 처했다. 재계 관계자는 “중국은 미국과 갈등으로 상당한 무역 제재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주력 산업이 중국 앞에 줄줄이 무너지고 있는 형국”이라고 했다.
“핵심 기술 64개 중 57개 중국 1위, 미국은 7개만 1위”(호주 전략정책연구소), “중국, 미국 제재 속 ‘제조2025′ 목표 86% 이상 달성”(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한·중 산업기술 격차 0.3년”(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
올 들어 국내외 연구소와 외신들이 내놓은 중국 관련 보고서의 주요 내용이다. 한국은 ‘중국이 턱밑까지 추격했다’는 표현을 자주 쓰지만, 더 이상 ‘추격’이 아니라 ‘추월’이 적합하다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1일 본지와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공동으로 분석한 최근 10년간 ‘한·중 8대 주력 산업의 세계 시장 수출 점유율 추이’에서도, 석유화학을 제외한 7개 부문 모두 중국에 뒤처지며 한국 경제가 중국이란 블랙홀에 점차 빨려 들어가고 있는 현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최근 한국은행이 내년 1.9%, 2026년 1.8%의 낮은 경제 성장률을 예측한 이유도 이에 기반한다. 만약 이 전망이 현실화되면 윤석열 정부 5년간의 연평균 성장률은 1.98%로, 역대 정부 처음으로 2% 밑으로 떨어지게 된다.
◇1%대 저성장…신성장 동력도 中이 주도권
한국은 2000년대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평균 성장률이 1%포인트 안팎으로 떨어져 왔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5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5.6%였다. 이후 노무현(4.7%) 정부부터 이명박(3.3%) 정부, 박근혜(3%) 정부, 문재인(2.4%) 정부에 이르기까지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고, 윤석열 정부에서도 이 같은 기조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장세가 약화되는 이유는 인구 구조의 고령화 속에 수출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가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상호 경제산업본부장은 “수출과 제조업 중심의 성장 동력이 크게 약화된 가운데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한 결과”라고 했다. 한국의 핵심 수출 산업인 자동차와 조선에서도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진다. 자동차 산업의 미래 전장인 전기차 시장은 이미 미국 테슬라와 중국의 BYD(비야디)로 양분된 가운데, 중국의 신생 전기차 업체들도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스마트폰 제조사로 유명한 화웨이는 올 상반기 자동차 사업으로 약 4300억원의 첫 흑자를 냈고, 샤오미도 첫 전기차 ‘SU7′을 생산한 지 8개월 만인 지난달 10만대 생산을 달성했다. 재계 관계자는 “중국은 자율자동차 시장에서도 과감하게 규제를 풀어, 수억 km에 달하는 주행 데이터를 쌓은 중국 업체들이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는 중”이라고 했다.
고부가가치 ‘친환경 선박’ 경쟁에서도 중국이 한국의 경쟁력을 넘어서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9월 세계 5위 선사 하파크로이트가 발주한 5조원 규모의 컨테이너선 24척 수주전에서, 중국 최대 민영 조선소인 양쯔장조선과 뉴타임즈조선이 한국 기업들을 제치고 계약을 따낸 것이 대표적이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조선업 가치 사슬 종합 경쟁력에서 중국이 한국을 제치고 첫 1위를 차지했다는 보고서에서 “연구개발과 설계에선 한국이 우위지만 생산과 수요, 서비스에선 중국이 앞선다”고 분석했다.
◇中, R&D에 한국의 3배 쏟아부어
중국은 과감하면서도 우직한 투자로 첨단 산업을 키워오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자국 대표 기업에 각각 2억7000만달러(약 3770억원)와 4억2000만달러(약 5865억원)의 보조금을 쏟아부었다. 이차전지 대표 기업인 CATL도 우리 돈으로 1조원이 넘는 보조금을 받았다. 같은 기간 국내 대표 기업들이 수령한 정부 보조금은 0원이었다.
이는 중국 기업들의 연구개발(R&D) 역량과 직결되고 있다. 최근 한경협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첨단 기업의 R&D 투자(2050억8000만달러)는 한국 첨단 기업(510억4000만달러)의 4배에 달했다. 지난 2013년부터 10년간 한국은 연평균 R&D 증가율이 5.7%였지만, 중국은 연평균 18.2%로 3배 이상이었다. 그 결과, 한국과 중국의 산업기술 격차는 지난 10년 새(2013~2023년) 1.1년에서 0.3년으로 급격히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