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식시장의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이 힘을 잃고 있다. 올 초부터 정부가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주요 기업들이 일제히 주주친화 정책을 발표했지만 주가는 오르기는커녕 제자리걸음이거나 오히려 발표 시점보다 떨어졌다.
한국 주요 기업들이 다양한 밸류업 방법에도 불구하고 자사주 매입, 소각을 주로 앞세우는 데다, 외국인 투자자들로부터 이런 움직임이 지속적이지도 않을 것이란 평가를 받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최근 한 달 새 삼성전자 10조원, 현대차 1조원, ㈜LG 5000억원 등 주요 기업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줄줄이 자사주 매입, 소각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트럼프 2기’ 리스크에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 등 대외적 여건이 좋지 않은 시기에 밸류업이 추진되면서 힘을 받지 못한 것도 요인으로 꼽힌다. 여기에다 비상계엄 이후 내각 총사퇴, 대통령 탄핵 추진 등 일련의 사태가 외국인 투자자들에겐 불확실성으로 작용하며 현재 해외 투자금이 계속 빠져 나가고 있다.
◇힘 못 쓰는 ‘K 밸류업’, 왜?
6일 본지가 최근 자사주 매입 등 밸류업 정책을 발표한 주요 기업들의 주가 추이를 분석한 결과, 주가가 발표 이후 거의 제자리걸음이거나 오히려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15일 장 마감 이후 ‘10조원 규모 자사주 매입’ 계획을 내놓은 삼성전자는 주가가 발표 당일 5만3500원에서, 6일 종가 기준 5만4100원으로 1% 오르는 데 그쳤다. 지난달 27일 1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계획을 내놓은 현대차 역시 주가가 22만1000원에서 20만3500원(6일 기준)으로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5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소각 계획을 내놓은 ㈜LG 역시 발표 이후 주가가 1% 하락했다. 지난 10월 말 1500억원의 자사주 추가 매입, 소각 계획을 밝힌 하나금융지주를 비롯한 금융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자사주 매입과 소각에 매달리는 한국 기업들의 제한된 밸류업이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업가치를 높이려면 신규 사업 진출, 대규모 인수합병(M&A), 연구개발 투자, 시설 확장 등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한국 기업들은 유독 ‘돈을 허공에 날린다’는 평가를 받는 자사주 매입, 소각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10년 새 2014년(2조4000억원)과 2015년(11조3000억원), 2017년(9조3000억원) 등 세 차례에 걸쳐 자사주 매입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근본적인 체질 개선보다는 주가 하락세를 막는 미봉책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달 삼성전자가 10조원 규모 대책을 발표했을 때도, 주가는 2거래일 연속 반짝 상승하는 데 그쳤고 주가는 여전히 약세다. 금융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계속 주주 친화정책을 발표해서 주가를 끌어올릴 것이란 기대가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대기업들이 소액주주 권리를 높이는 데 적극적이지 않을 것이란 인식이 크다”고 했다. 정부 주도로 일제히 자사주 매입을 앞세운 주주친화책을 내놓긴 했지만, 지속가능성에는 의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국회에서 논의 중인 ‘상법 개정안’을 대기업과 경제단체들이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움직임 역시 외국인 투자자들에겐 진정성이 크지 않은 모습으로 비친다는 해석도 나온다.
현재 반도체, 이차전지, 철강 등 주력 산업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뚜렷한 미래 성장 동력이 될 업종이 보이지 않는 것도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서울대 안동현 경제학부 교수는 “부동산으로의 자금 쏠림, 낮은 기관투자자 비중, 과다한 상장사 수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작용했다”고 말했다.
◇”자사주 소각 넘어 장기 전략 짜야”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들이 자사주 매입, 소각과 같은 단기적 정책에 치중하지 말고 근본적인 성장 전략을 짤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아무리 밸류업 정책을 내놔도 결국 기업의 이익이 증가하지 않으면 주가가 오를 수 없다”며 “기업들은 자사주 매입 못잖게 글로벌 우수 인력 채용이나, 연구개발 투자를 늘리는 식의 장기적인 전략에도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인 상속·증여세율을 손보는 것이 주가 상승을 견인하는 현실적 대안이란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