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20일(현지 시각) EU(유럽연합)를 향해 “미국산 석유·가스를 대규모로 수입하라”고 요구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직접적으로 동맹국을 향해 에너지 수입을 압박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에너지 증산과 동맹국에 대한 수출 확대, 러시아·이란 등을 상대로 한 제재 강화를 통해 ‘에너지 패권(energy dominance)’을 확보한다는 트럼프 2기 에너지 정책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EU의 석유·가스 수입 확대가 필요한 이유로 ‘무역 적자’를 언급한 가운데 미국의 10대 무역 적자국인 우리나라도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우리로서는 석유와 가스 수입국을 다변화해 소비자 가격을 다소 낮출 수 있다는 기대가 있지만, 먼 수송 거리에 따른 수급 불안정성 등은 변수로 꼽힌다.

AI(인공지능)의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친(親)화석연료를 앞세운 트럼프 2기 출범으로 미국이 글로벌 에너지 주도권을 강화하는 모습이다.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만으로는 충당하기 어려워지면서 석유·가스 등 화석연료의 역할이 다시 부각되자 석유·가스 1위 생산국인 미국이 ‘에너지 헤게모니’ 장악에 나선 것이다.

그래픽=양인성

◇트럼프, 미국산 에너지 수입 압박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 20일 자신이 운영하는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서 “엄청난 (미국의 대EU 무역) 적자를 보상해주기 위해 (EU가) 미국의 석유와 가스를 대규모로 구매해줘야 한다고 EU에 얘기했다”며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 끝장을 볼 때까지 관세(를 부과하겠다)!!!”이라고 했다.

글로벌 에너지 헤게모니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는 관측이 나온다. 1970년대 초 사우디아라비아가 모든 원유 수출 대금을 달러로 결제하도록 한 ‘페트로달러’ 협정을 통해 미국이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사우디 주도의 OPEC(석유수출국기구)와 공생을 선택한 1라운드, 2010년대 셰일 혁명으로 미국산 석유·가스 생산이 급증하면서 이른바 ‘에너지 자립(energy independence)’과 함께 중동에서 한 발짝 물러섰던 2라운드에 이어, 미국이 석유·가스 수출로 글로벌 에너지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3라운드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EU는 2010년대 들어 노르드스트림1 등이 완공되며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이 확대되고, 풍력·태양광 등 재생에너지의 발전 단가가 떨어지자 탈원전·탈석탄을 주도하면서 트럼프 1기 당시 미국에 맞섰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에너지 위기가 심화하자 유럽 국가들은 미국산 에너지에 손을 벌렸다. 2021년 유럽 28국(EU와 영국)의 LNG(액화천연가스) 수입 중 27%에 그쳤던 미국산 비율은 지난해 48%까지 늘었다.

트럼프 당선인의 발언이 전해지자 올로프 질 EU 집행위 대변인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이미 차기 미 행정부와 에너지 문제를 포함해 건설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며 말을 아꼈다. 지난달 8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러시아산을 미국산 LNG로 대체하면 우리에게는 더 저렴해 에너지 가격을 낮출 수도 있다”고 말했다.

EU뿐만이 아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최근 “미국산 수입 확대 필요성이 있다”며 “석유·가스는 가격이 합리적이어서 유리한 조건으로 확보할 여지가 있다”고 했다. 일본도 미국산 LNG 수입을 크게 늘릴 것으로 알려졌다.

박주헌 동덕여대 교수는 “그동안 대세로 여겨져 왔던 재생에너지 중심 정책이 각국에서 둔화할 가능성 크다”며 “에너지 헤게모니 3라운드가 시작되는 시점을 맞아 현명한 정책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구책 찾는 ‘新 악의 축’

트럼프 2기가 들어서며 러시아와 이란 등 ‘신(新) 악의 축’ 산유국에 대한 제재는 더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제재를 통해 러시아와 이란의 물량을 줄이며 시장의 수급을 맞추려고 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미 제재는 강화되고 있다. 미국과 보조를 맞추는 EU는 러시아산 원유를 외국에 수출하는 ‘그림자 함대’ 선박 45척을 제재 대상에 추가하기로 했고, 미국은 이란과 후티 반군 관련 유조선 등을 대상으로 추가 제재에 나섰다.

러시아와 이란 등은 자구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는 1990년대 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등장 이후 유럽에 대한 에너지 장악력을 확대해왔지만, 이젠 인도·중국 등으로 협력선을 바꾸고 있다. 러시아 국영 로스네프트는 인도 릴라이언스와 하루 50만 배럴에 이르는 원유 공급 계약을 맺었고, 이달 초엔 시베리아산 가스를 중국으로 보내는 5111㎞ 규모 ‘파워 오브 시베리아 가스관’ 공사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