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3일 경제 관계 장관 회의를 열어 장기 침체에 빠진 석유화학 업계에 대한 지원책이 담긴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했다. 지난 4월 산업부와 석화 업계가 함께 ‘석화 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 협의체’를 꾸린 지 8개월 만이다. 최근 탄핵 정국 여파로 지원책 발표가 미뤄지는 것
아니냐는 예상도 있었지만, “현재 석화 산업 불황은 기간산업으로서 존폐가 걸린 구조적 문제”라고 호소한 업계의 위기감을 정부도 심각하게 진단했다는 평이 나온다.
◇정부, 구조적 공급 과잉 진단… 사업 개편 지원
정부는 우선 장기 불황에 빠진 ‘석유화학의 쌀’, 에틸렌 산업의 사업 재편을 위해 매각, 인수·합병(M&A), 설비 폐쇄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2018년만 해도 수출의 약 8.2%(약 500억달러)를 달성하며 ‘수출 효자’ 역할을 했고, 세계 4위권 생산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현재는 글로벌 공급 과잉으로 구조 조정 1순위에 놓인 처지다.
국내 석화 산업은 에틸렌의 원료인 나프타를 국내 정유사 또는 해외에서 구매한 뒤 NCC(나프타 분해 설비) 공장을 돌려 에틸렌을 생산, 판매하며 그 차익을 가져가는 구조였다. 에틸렌을 기반으로 만드는 플라스틱 제품은 병뚜껑, 필름, 비닐, 전자 기기, 기저귀, 마스크 등으로 광범위하다.
그러나 이 사업 구조는 중국의 대규모 설비 증설로 경쟁력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년 기준 중국의 에틸렌 생산 능력은 약 5274만t(톤)으로, 한국(1280만t)의 4배 수준이다. 정부는 사업 재편 기업의 경우 지주회사 지분 규제 유예 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늘리고, 공정거래위원회 심사 간소화도 지원하기로 했다. 또, 석화 업계에 3조원 규모 정책금융을 마련해 빠른 구조 조정을 유도하기로 했다. 재편 과정에서 공장이 폐쇄돼 타격을 입는 지역은 ‘산업 위기 선제 대응 지역’으로 지정해 고용 유지 지원금, 대출 만기 연장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석화 업계의 생산 비용 절감 지원책, 향후 경쟁력 확보를 위한 지원도 강화한다. 나프타 제조용 원유에 대한 무관세 기간을 내년 말까지 1년 더 연장하고, 범용 제품이 아닌 고부가가치(스페셜티) 제품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바꿀 수 있도록 내년 상반기 중 ‘2025~2030년 R&D 투자 로드맵’을 수립해 발표하기로 했다. 1990년대 한국 석화 기업과 마찬가지로 범용 제품 경쟁력을 잃었지만, 항공 첨단 소재 등으로 활로를 찾은 일본 도레이 등이 ‘롤모델’이다.
◇中 이어 중동까지 석화 증설 계속돼
한국화학산업협회는 이날 정부 방안에 대해 “주요 NCC 기업은 3년 연속 영업 적자가 지속하고 역대 최악의 실적을 기록 중이었다”며 “정부의 속도감 있는 지원이 절실하다”며 환영 입장을 내놨다. 그러나 LG화학, 롯데케미칼 등 주요 기업은 이미 공장 가동을 중단했거나 매각을 검토 중이지만 매수자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에틸렌 공급 과잉이 지속할 것으로 전망하기 때문이다. 한때 연간 조 단위 영업이익을 올렸던 롯데케미칼은 최근 3년 수천억 원대 적자를 기록했다.
올해 초 기준 글로벌 생산 능력은 약 2억2900만t, 수요는 1억8800만t인 상황에서 중국과 중동 지역에선 대규모 증설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 석화 제품의 주요 수출국이었던 중국은 이미 자국 내 에틸렌 5000만t 이상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수출 물량을 쏟아내고 있다.
특히 석유화학으로 사업을 넓힌 중동발(發) 증설도 거세다. 중동 에너지 기업들은 원유에서 바로 에틸렌을 생산하는 COTC 기술을 바탕으로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나프타를 거쳐 에틸렌을 만드는 한국 기업으로선 치명적인 경쟁자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에너지 기업 아람코도 약 9조원을 투자해 2026년까지 울산에 대규모 석유화학 생산 단지를 조성한다. 연간 에틸렌 180만t을 생산할 수 있는데 핵심은 ‘수직계열화’다. 원유, 나프타, 에틸렌으로 이어지는 공정에서 원료를 모두 자체 조달하면서 국내 기업의 NCC 공장 대비 약 3분의 1 수준으로 에틸렌을 생산할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 일각에선 “2016년에도 정부 합동 대책으로 설비 효율화, 스페셜티 개발 등 대책을 내놨지만 크게 달라진 게 없다”며 “중국 시장을 지나치게 믿고, 일시적인 팬데믹 특수를 누리다가 체질 개선이 너무 늦었다”는 의견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