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왼쪽에서 셋째) 대통령 권한대행이 23일 서울 총리공관에서 경제 단체장들을 오찬 장소로 안내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한 권한대행,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 윤진식 한국무역협회 회장. /뉴시스

“정치도 어렵겠지만, 경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65일 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죽을 맛입니다.”(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대내외 불확실성으로 한국 경제의 위기감이 고조된 가운데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23일 주요 경제단체장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기업인들은 내수·수출의 동반 부진, ‘트럼프 2기’ 출범에 따른 불확실성, 기업 활동 관련 시급한 법안 논의 중단 등에 따른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날 총리 공관에서 열린 오찬 간담회에는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윤진식 한국무역협회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이호준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최진식 회장은 해외 출장) 등 6개 단체 대표가 참석했다. 한 권한대행은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주요 경제단체장, 4대 그룹 총수들과 통화한 데 이어 이날 간담회를 가졌다.

참석자들은 “기업들도 위기 극복을 위해 뛰겠다”면서, 정부에도 “리세션(recession·경기 침체)이 오지 않도록 선제 대응해달라” 등의 요청을 전달했다. 한 권한대행은 “내년 상반기에 전체 예산의 75%를 배정해 신속히 집행하겠다”며 “건설적인 재정의 역할을 결코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래픽=양인성

“송년 모임이나 단체 여행 예약이 줄줄이 취소돼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는 연말 특수가 사라졌다며 허탈해하고 있고, 계약 직전까지 간 수출 상담을 해외 바이어가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등 내수뿐 아니라 수출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날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과의 간담회에 참석한 6대 경제단체 대표들은 산업 현장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토로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선 준비해간 자료를 읽고 정부 관계자의 발언을 청취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만큼 산업계의 상황이 절박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고환율, 대외신인도 타격” 토로

특히 대기업부터 중소·중견기업에 이르기까지, 최근 1450원대로 치솟은 고환율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단체장이 많았다. 김기문 중기중앙회장은 “보통 환율이 오르면 수출 기업들이 잘되는 것 아니냐고 많이 말씀하시는데, 기업인들은 속이 터질 지경”이라고 발언을 시작했다. 그는 “예전처럼 우리가 부품까지 다 만드는 게 아니라 중소기업도 상당수 부품은 중국 등에서 수입해 오는데 구매 3~6개월 뒤에 대금을 갚는 구조라 환율 급등이 큰 부담이 된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어 “수출 중소기업의 마진이 통상 5~10% 정도인데 원자재와 부품 값이 10% 넘게 오르면서 제품을 팔아도 적자를 보거나 간신히 수지타산을 맞추는 실정”이라고 했다.

이호준 중견련 상근부회장도 “고환율이 장기화하면서 원부자재 수입 비용이 크게 오르다 보니 내수 기업은 물론 수출 중견기업의 부담도 치솟고 있다”며 “특히 중견기업들은 번 만큼 다시 투자하는 방식으로 성장해 온 탓에, 부족한 신용 등급으로 인한 금융 애로 역시 가중되고 있다”고 했다. 유동성이 부족한 중소, 중견기업들이 고환율로 인한 타격을 가장 먼저 입고 있다는 뜻이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도 “가장 나쁜 상황을 피하려면 환율과 같은 거시 지표를 어떻게 방어하느냐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했다.

비상계엄부터 탄핵 정국까지 이어진 정치 상황에, 한국 대외 신인도 타격이 생각보다 상당히 크게 느껴진다는 기업인들의 반응도 많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단체장은 “수출 기업들을 만나면 정치 불안으로 국가 신인도와 위상이 추락해 시장에서 ‘코리아 프리미엄’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바뀌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많이 한다”고 했다. 윤진식 무역협회 회장은 비슷한 해외 분위기를 전하며, 이 같은 우려를 잠재우기 위한 공식 서한을 세계 각국에 보냈다고 밝혔다. 최태원 회장도 세계 상공회의소 회장과 주한 외국 대사들에게 이 같은 서한을 보냈다.

◇”멀리 보고 투자하게 해달라”

이날 기업인들은 한 권한대행에게 “멀리 보고 투자할 환경을 만들어달라”는 요청도 했다. 류진 한경협 회장은 “성장 동력을 꺼뜨리지 않으려면 첨단 산업의 경쟁력 회복이 급선무”라며 “올해 일몰되는 국가 전략기술에 대한 연구개발(R&D) 세제 혜택 연장, 반도체 산업에 대한 경쟁국 수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국가 전략 전력망을 대대적으로 확충해 첨단 제조업 가동에 차질이 없도록 해달라”고도 요청했다.

손경식 경총 회장도 “반도체, 미래차, 이차 전지 같은 국가 전략산업 분야에 대한 보조금 지급, 근로시간 규제 완화 같은 대책들도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검토해달라”고 했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지금 경기 진작과 더불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AI 인프라 스트럭처(구조)를 만들 필요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