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현국

화장품업체 A사는 최근 유럽, 동남아시아 등에서 수입하는 원·부자재 재고 전수 조사를 했다. 올 초 대비 환율이 10% 넘게 오르면서 원·부자재를 추가 주문하지 않고 재고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 회사 관계자는 “영업이익률이 10%가 채 안 되는데 환율로 다 까먹을 판”이라면서 “환율이 오르면 수출 기업은 더 좋지 않느냐고 하지만 속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우리 수출의 새로운 엔진으로 부상한 K뷰티와 K푸드 기업들이 떨고 있다. 올해 화장품과 농식품 수출액이 역대 최고 기록을 쓰는 등 K뷰티와 K푸드가 전성시대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예상 밖 고환율 변수에 위기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가격 인상이 쉽지 않는 상황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원료 등을 수입에 대거 의존해 왔는데, 환율이 급등하면서 실적 악화가 불가피한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계엄 파동 이후 한국에 대한 이미지 손상에 대한 우려와 두 업계가 공을 들이고 있는 미국에서 내년 1월 출범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관세 폭탄’을 앞세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K뷰티와 K푸드 기업들의 근심이 커지고 있다.

그래픽=김현국

◇고환율에 우는 K브랜드

올해 1~11월 우리나라 화장품 수출액은 93억달러(약 13조5000억원)로 집계됐다. 역대 최고치인 2021년 전체 수출액 92억달러를 이미 뛰어넘었다. 올해 11월 말 기준 농식품 수출 누적액(잠정)은 전년 동기 대비 8.1% 증가한 90억4800만달러(약 13조1200억원)를 기록했다. K푸드 주요 상품이자 수출 상위 품목인 라면(11억3800만달러), 과자류(7억600만달러), 음료류(6억900만달러), 커피조제품(3억400만달러), 쌀가공식품(2억7500만달러) 등은 역대 최고 실적을 냈다.

하지만 최근 식품, 화장품 업계는 우울한 분위기다. ‘K 전성시대’가 지속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반응까지 나온다. 원·부자재 수입 비중이 높은 식품업계와 화장품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건 고환율의 장기화다. 통상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다. 하지만 이는 두 업계에 적용되지 않는 공식이라는 반응이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K푸드의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라면, 과자 등은 원재료의 70%를 수입에 의존한다”며 “원재료 수입 부담이 늘면 제조 원가 자체가 높아져 수출로 얻은 이익이 줄게 된다”고 말했다. 화장품업체 관계자는 “고급 원료는 유럽에서, 나머지 원료는 동남아에서 수입하고 있다”며 “고환율이 장기화하면 원·부자재를 대거 갖고 있는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곤 실적 악화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CJ제일제당은 지난 3분기 사업보고서에서 환율이 10% 뛸 경우 세후 이익이 141억원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래픽=김현국

화장품 업체는 고환율이 지속되면 ‘선순환 구조’가 끊길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K뷰티는 보통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제품이 등장하고, 입소문과 마케팅의 힘으로 해외에서도 잘 팔리는 구조다. 문제는 고환율이 계속되면 국내 소비 위축이 극심해지고, 한국 시장에서 히트 상품이 나오지 않아 해외에서도 한국 제품을 찾는 수요가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장품업체 관계자는 “고환율로 비용 부담이 커지면 당장 광고, 할인 등 마케팅 비용부터 줄일 수밖에 없다”며 “필수재가 아닌 화장품은 마케팅이 줄면 판매량이 급감하는 악순환에 접어들게 된다”고 말했다.

◇트럼프 시대가 더 두려운 K산업

‘미국 리스크’도 K푸드·뷰티를 떨게 하고 있다. 두 업계는 공통적으로 미국 시장에 공을 들여왔다. 여전히 중국 시장의 비중이 적지 않지만, 미국 시장의 성장세가 가파르기 때문이다. 올해 3분기까지 국내 화장품 중국 수출액은 9% 감소한 반면 미국 수출액은 38.6% 증가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1~10월 대미(對美) 농식품 누적 수출액은 13억660만달러(약 1조90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22.1% 증가했다. 쌀 가공식품과 라면도 전년 동기 대비 수출액이 각각 55.9%, 65% 늘었다.

문제는 공들여온 미국 시장이 안갯속이라는 것이다. 화장품과 식품은 미국에 무관세로 수출을 해왔는데,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공약으로 보편 관세 부과를 내세웠다. 식품, 화장품을 포함한 한국산 제품에 대해 10% 이상의 관세가 부과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미국 대선 직전인 지난 10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공화당이 집권하면 미국 정부가 그동안 대미 수출에 흑자를 기록해 온 국가들에 대해 무역수지를 개선하려 할 것”이라며 “가격 경쟁력의 약화는 농식품 수출 둔화로 이어질 우려가 있으며 국내 농식품 수급과 가격 문제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화장품 업체 관계자는 “환율 상승에 더해 관세 리스크까지 겹치면 ‘아메리칸 드림’을 꿈꿔온 기업들은 망연자실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며 “중국 의존도를 줄여 미국에 집중하는 전략을 펼쳐온 기업들은 또 다시 전략 수정을 해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주덕 성신여대 뷰티산업학과 교수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중국 등이 수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며 “정부 부처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우리 기업들이 대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