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울산광역시 동구에 있는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인도 항만해운수로부 알 락슈마난 차관보, 최대 국영 조선사 코친조선소의 마두 나이르 CEO(최고경영자), 최대 국영 선사 인도해운공사(SCI)의 비네시 쿠마르 티아기 CEO 등 ‘인도 조선업 대표단’이었다. HD현대중공업 조민수 조선사업대표(부사장)가 이들을 안내했다.
인도 조선 업계 관계자들이 HD현대중공업 조선소를 직접 찾은 건 2015년 나렌드라 모디 총리 방한 이후 약 10년 만이었다. 이들은 독(Dock)과 육상 야드에서 대형 선박을 연간 최대 50여 척 건조할 수 있는 조선소의 운영 체계와 친환경 선박 기술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인도에선 모든 종류의 선박이 대규모로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들이 한국 조선소를 찾은 이유는 ‘신규 상선 1000척 확보’를 포함해 사활을 건 자국 조선업 육성의 파트너를 찾기 위해서였다. 인도는 화물 운반용 컨테이너선뿐 아니라, LNG 운반선, 초대형 원유 운반선, 자동차 운반선 등 모든 종류의 상업용 선박 확충을 노리고 있다. 이들은 방한 일정 중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조선소 등 국내 ‘빅3′ 조선소를 모두 찾았다.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 정부는 현재 세계 조선 시장 점유율 1% 미만인 인도의 조선업 역량을 2030년 세계 10위, 2047년까지 세계 5위로 빠르게 키우겠다는 로드맵을 추진하고 있다. 이 목표를 위해 세계 최고 수준 기술력과 인프라를 보유한 한국 조선업에 ‘SOS’를 보내며 적극적인 투자와 협력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도 지난달 당선 직후 “한국의 세계적인 군함과 선박 건조 능력을 잘 알고 있다”며 콕 짚어 한국 조선업에 SOS를 요청한 바 있다.
미국, 인도의 현재 공통 과제는 해양 경쟁력이다. 인도는 전체 무역 물량의 약 95%를 해운에 의존하고 있지만 자국 조선업이 취약해 해외 선박을 빌리는 데만 연간 약 110조원을 쓰고 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수출입이 증가하는 2047년에는 연간 약 500조원을 지출해야 한다고 예상한다. 자국 조선사 28곳이 있지만 연안 여객선 등 중소형 선박만 주로 건조한다. 대형 컨테이너선, 초대형 원유 운반선, 자동차 운반선 등은 직접 만들지 못한다.
미국은 남중국해 등에서 중국과 해양 패권 경쟁이 이어지는 데 핵심인 해군력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자국 조선업 인프라가 붕괴돼 잠수함 등 핵심 전력을 수리하는 데 수십 개월이 걸리고 있다. 미국 군함 MRO(유지·보수·정비) 시장만 연간 20조원대로 추산된다.
2010년대 장기 불황을 버티고 최근 호황을 맞은 한국 조선업이 최적 파트너로 꼽히는 이유다. 197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 조선업은 일본, 유럽 조선소를 빠르게 따라잡아 1990년대 말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20년 가까이 세계 1위를 지켜오다 중국의 물량 공세에 1위 자리를 내줬지만 아직도 경쟁력은 정상급이다. 부산을 시작으로 울산, 거제를 중심으로 조선업 협력 생태계가 탄탄하게 자리 잡았고, 중국의 저가 공세로 일본 조선업이 사실상 구조조정에 돌입했을 때도 LNG 운반선, 친환경 이중 연료 기술 개발로 기술 격차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원유, 천연가스 등 에너지를 대규모 수입할 수 있는 에너지 운반선, 대규모 화물을 운반하는 컨테이너선, 북한과 안보 대치에 따른 군함 등 다양한 선종에서 기술력을 고도화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에너지 안보’의 핵심으로 떠오른 액화천연가스(LNG) 산업에서도 한국 조선업의 LNG 운반선이 최고로 꼽힌다. 특히 올해는 조선 3사가 13년 만에 동반 흑자가 유력하고, 영업 실적이 개선되고 있어 R&D 투자 여력도 높아지고 있다.
미국, 인도 모두 한국과의 협력을 통해 자국에 ‘조선 클러스터’ 육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인도는 한국 조선사와 자국에서 인프라가 가장 우수한 조선소를 이용해 시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이후 여기서 쌓은 기술력을 다른 현지 조선소에 전수하는 방안을 희망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 3사뿐 아니라 조선업 전반에서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의 장비 제조 업체와 협력도 검토하고 있다. 내년 3월에는 항만해운수로부 장관이 직접 한국을 찾아 관련 협정을 체결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에선 최근 한화오션이 현지 필리조선소 인수를 완료하고 본격적으로 현지 인프라 재건에 나섰다. 현재 미 해군 MRO 사업을 따내 국내에서 미군 함정 수리를 진행 중인데, 장기적으로 함정 수주까지 노린다는 계획이다.
다만,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K조선이 풀어야 할 숙제도 많다. 당장 극심한 인력난을 풀기 위해선 숙련 외국인 노동자의 확보가 절실하다. 정부 규제를 대폭 풀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양종서 한국수출입은행 수석연구원은 2025년 해운·조선업 전망 보고서를 통해 “중국이 막대한 정부 지원을 기반으로 기술력 격차를 좁힌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우리도 스마트야드 등을 투자하며 고강도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