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양진경

한미 양국 정부가 세계 원전 시장 공동 진출을 위한 ‘원자력 수출·협력 약정(MOU)’에 서명했다. AI(인공지능)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각국이 잇따라 원전 건설에 나서는 가운데 한미 양국이 이른바 ‘팀 코러스(KORUS·Korea+US)’를 구성해 세계 원전 시장 공략에 나서는 것이다. 세계원자력협회(WNA)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운전 중인 원전은 440기, 건설 중인 것은 65기이지만, 계약을 진행하고 있거나 부지를 선정한 것과 같이 계획·추진 중인 원전은 430기에 이른다.

한미 양국 원전 수출 파트너십의 윤곽이 잡힌 데 이어 MOU를 한 단계 더 구체화하는 한국수력원자력과 미국 웨스팅하우스 간 합의안도 조만간 나올 것으로 알려졌다. 두 회사는 한수원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24조원 규모 체코 원전 수출에 웨스팅하우스가 이의 제기를 중단하는 데 합의했으며, 이와 함께 한수원이 유럽 시장에 진출할 때는 웨스팅하우스와 조율하고, 중동 등의 시장에선 한국이 ‘한국형 원전’으로 진출하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외교부는 8일(현지 시각) 미국에서 미 에너지부 및 국무부와 ‘한미 원자력 수출 및 협력 원칙에 관한 기관 간 MOU’에 서명했다. 지난해 11월 잠정 합의한 지 두 달 만이다. 이번 MOU를 통해 양국이 글로벌 원전 시장 공략 협력을 공식 선언했다는 풀이가 나온다.

◇2년 분쟁 종지부… K원전 ‘웨스팅하우스 족쇄’ 풀었다

정부 간 MOU가 체결됨에 따라 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간 지식재산권 협상도 곧 결과를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웨스팅하우스가 2022년 10월 한국형 원전에 자사 원천 기술이 적용됐다며 미 법원에 한수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서 2년 넘게 이어진 분쟁이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그래픽=양진경

9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우선 두 회사는 3월로 다가온 한수원의 체코 원전 본계약과 관련해 앞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로 했다. 양국 정부 간 MOU와 함께 체코 원전 수출의 가장 큰 걸림돌로 꼽히던 웨스팅하우스와의 분쟁이 끝난 것이다. 웨스팅하우스는 지분 100%를 캐나다 사모 펀드 브룩필드(51%)와 우라늄 업체 카메코(49%)가 나눠 갖고 있지만, 원전 업체라는 특성상 미국 정부 정책에 영향을 받는다.

앞서 원천 기술 소유권을 주장해 온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이 체코 신규 원전 2기 수주전에서 자신들을 제치고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자 체코 당국에 이의를 제기하며 발목을 잡아왔다. 체코 계약은 물론, 앞으로도 원활한 원전 수출을 위해선 웨스팅하우스와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관측이 많았다. 한 원전 업계 관계자는 “한수원은 기술 국산화를 통해 지재권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관련 소송이 길어지면서 발목을 잡을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앞으로 추가 수주를 위해선 이번 기회에 지재권 논란을 매듭짓는 게 불가피하다는 목소리도 컸다”고 전했다.

◇유럽, 중동 등 역할 분담

이와 함께 세계 원전 시장에서 유럽은 미국, 중동 등은 한국이 진출을 주도하는 역할 분담에도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프랑스 EDF(프랑스전력공사)의 안방인 유럽에서는 웨스팅하우스가 신사업을 주도하는 가운데 한전과 한수원이 웨스팅하우스의 승인 아래 선별적으로 진출하고, 우리나라가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1~4호기를 건설하며 노하우를 쌓은 중동에는 지재권 논란 없이 한국형 원전을 수출한다는 것이다. 세계원자력협회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계획·추진 중인 원전 430기 중 자국 업체가 건설하는 국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유럽과 중동에 몰려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자금력과 외교력을 바탕으로 세계 원전 시장에 깊숙이 침투하는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이 손을 잡고 시장을 지키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앞서 우리나라는 체코 원전 입찰에서 미국, 프랑스와 3파전을 벌였고, 폴란드 신규 원전 사업자 선정에선 웨스팅하우스에 밀렸다. 정상(頂上) 외교 등이 수반되는 원전 수주전은 탈락하면 후유증이 큰 상황에서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2022년 수주전 당시 폴란드도 우리 기술력은 인정했지만, 외교·안보 측면에서 미국 웨스팅하우스를 선택한 것으로 안다”며 “체코도 한수원을 선정한 뒤 NSC(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을 정도로 원전 수주는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 외에도 고려하는 점이 많다”고 전했다.

웨스팅하우스가 유럽에서 원전을 건설할 때 국내 건설사나 기자재 업체 등 우리 원전 생태계 기업들과 동반 진출하는 방안도 합의안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건설이 10조원 규모 시공 사업을 진행하는 불가리아 코즐로두이 원전처럼 웨스팅하우스가 사업자로 참여하는 원전도 국내 업체에 기회가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당장 상반기에 입찰이 유력한 사우디아라비아 2기 등 중동 시장에서 우선권을 받으며 실리를 챙겼다는 평가도 나온다. 앞서 ‘팀 코리아’는 2009년 UAE 바라카 1~4호기 수주 후 사막 기후에서 처음으로 짓는 원전을 설계부터 가동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를 토대로 비슷한 날씨인 이집트 엘다바 원전엔 한수원과 두산에너빌리티 등이 시공과 기자재 공급처로 참여하고 있다. 한 원전 당국자는 “자본력이 약한 우리로서는 중동과 같이 해당국 정부가 100% 사업비를 책임지는 사업이 부담이 적다”고 전했다.

◇유럽 단독 진출도 기대

일각에서는 MOU에 이은 양사 간 합의가 한국이 유럽 시장을 놓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웨스팅하우스의 승인 없이는 유럽 시장 입찰에 참여하지 못하게 돼 미국과 경쟁 중인 네덜란드 원전 수주전 등에서 철수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 시장에서 웨스팅하우스가 모든 사업을 따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유럽 단독 진출도 가능하다는 예상도 나온다.

한편 이날 루카스 블체크 체코 산업통상부 장관은 소셜미디어에 “한·미 양국 정부의 MOU 체결을 환영한다”며 “체코 신규 원전 프로젝트에도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정동욱 중앙대 교수는 “원전 시장 확대 속에서 중국, 러시아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결정”이라며 “다만, 둘 다 ‘윈윈’이기 위해선 구체적인 내용을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