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러시아 원유 제재 확대 발표 이후 급등하던 국제 유가가 14일(현지 시각) 다시 꺾였다. 이날 브렌트유는 전날보다 1.09달러(1.35%) 내린 79.92달러에 마감했고, 서부텍사스산원유(WTI)도 1.32달러(1.67%) 떨어진 배럴당 77.5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 8일 이후 4거래일 만의 하락이다.
앞서 대(對)러 제재로 세계 1·3위 수입국인 중국과 인도가 원유 공급 부족에 처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며 유가가 5개월 만에 최고치를 나타냈지만, 얼마 못 가 상승 랠리가 멈춰 선 것이다. 유가 상승세 속에 골드만삭스는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90달러를 넘을 수 있다”는 예상까지 내놨지만, 내림세로 돌아서며 이 같은 전망은 무색해졌다.
국제 유가의 기준이 되는 브렌트유는 2023년 11월 이후 1년 3개월째 배럴당 70~80달러대에 머물고 있다. 지난해 4월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미사일 공격이 오가며 전면전 우려가 커졌을 때 잠시 90달러를 웃돌았을 뿐이다. 국내 기름 값을 결정하는 두바이유도 작년 4월 이후 90달러를 찍은 적이 없다. 브렌트유보다 가격이 다소 낮게 형성되는 WTI는 2023년 9월 이후로 줄곧 90달러 아래였다.
코로나 시기였던 2020년 배럴당 20~30달러대에 그쳤던 국제 유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3월에는 사상 최고치인 배럴당 127달러를 기록했지만, 이후 전쟁이 길어지고 유가가 안정세를 찾으면서 이른바 ‘90달러 벽’에 막힌 상황이다.
① 경기 둔화에 두 개의 전쟁도 힘 못 써
지난 1년여 동안 국제 유가가 박스권에 멈춰 선 가장 큰 이유로는 세계적인 경기 둔화 우려가 꼽힌다. 특히 미·중 갈등이 격해지고 세계 최대 석유 소비 시장인 중국의 수요가 살아나지 못하면서 좀처럼 유가는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전기차와 LNG(액화천연가스) 차량 등의 확산도 중국의 석유 제품 수요를 줄이고 있다. 지난달 중국 국영 시노펙은 올해 중국의 경유 수요는 작년보다 5.5% 감소한 1억7400만t에 그치고, 휘발유 또한 2.4% 줄어든 1억7300만t에 머물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해 8월 “중국 경제 둔화가 석유 소비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올해 세계 석유 수요 증가 전망치를 이전보다 하루 5만배럴 낮췄고, OPEC(석유수출국기구)도 같은 이유로 지난해 9월 올해 수요 증가 전망치를 기존 하루 178만배럴에서 174만배럴로 내린 데 이어 10월에 164만배럴, 11월에 154만배럴까지 4개월 연속 낮췄다. 세계의 공장이자 세계의 시장으로 불리던 중국의 침체가 국제 유가에도 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②석유 생산 1위 미국
과거 중동산 원유에 의존하던 미국이 스스로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이 된 것도 더는 중동의 지정학 위기에 유가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로 꼽힌다. 미국은 2018년 하루 1096만배럴을 생산하며,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를 밀어내고 원유 생산 1위 국가가 됐다. 2020년부터는 1949년 이후 잃었던 순(純) 석유 수출국 지위도 회복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취임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친(親)화석연료 정책을 예고하면서 미국의 생산 능력은 더 확대될 전망이다. 지난 14일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석유 로비스트들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 당선인이 화석연료 생산을 강화하고 바이든의 전기차 도입을 되돌려놓을 행정명령을 준비하고 있다”며 이 같은 전망을 뒷받침했다. 미국의 생산력도 확대 추세다. 박희준 EIP 자산운용 대표는 “미국 셰일 업계가 주요 업체들 위주로 재편되고, 기술이 빠르게 발달하면서 생산력도 크게 좋아졌다”며 “과거와 비교하면 하나의 리그(시추공)에서 생산하는 원유·가스의 양은 3배 이상으로 많아졌다”고 전했다.
◇현재 수준, 한동안 이어질 듯
③ 제 코가 석 자인 중동
여기에 과거 원유를 무기로 국제 유가를 좌지우지하던 중동은 이제 오히려 유가 하락을 억제하는 수준으로 역할이 축소됐다. 오일머니에 국가 살림살이가 달렸다 보니 과거처럼 감산을 통해 유가를 급등시키기는커녕, 유가가 배럴당 70~80달러 선을 유지하자 이 선에서 재정 결손을 막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생산량을 조절하는 형편이다.
석유 수출국 협의체인 OPEC+(오펙 플러스)는 애초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할 예정이었던 감산 완화(증산) 일정을 수차례 미루며 지금은 오는 4월로 예고한 상태다. 중동 산유국들은 증산하면 유가가 올라가지 못하고, 감산을 이어간다고 해도 원유 수요의 상당 부분을 미국이 챙겨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손양훈 인천대 명예교수는 “OPEC이 감산을 완화하면 유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오일쇼크로 전 세계에 충격을 줬던 과거의 OPEC은 이제 없다”고 했다.
현재와 같은 수준에서 국제 유가가 한동안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김태환 에너지경제연구원 실장은 “미국이 경기 부양에 나서면서 일시적으로 80달러대 중반까지는 갈 수 있다”면서도 “수급 요인을 고려하면 배럴당 70달러대 후반이 적정 수준”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