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 지명자가 29일 미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반도체 보조금과 관련해 “내가 계약을 검토하기 전에 보조금 지급은 약속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2기 정부에서 산업·무역 정책을 총괄할 러트닉 지명자의 발언은 보조금 지급 계약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난해 말 전임 바이든 정부와 계약한 수조, 수천억 원 규모 보조금 수령이 불확실해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러트닉 장관 지명자가 이날 반도체뿐 아니라 자동차, 철강, 가전 등에 대해서도 현지 생산 확대라는 정책 방향을 밝히면서 우리나라 제조업에 ‘트럼프 리스크’가 현실로 나타났다는 진단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0일 취임 때 제조업 강국 재건이라는 지향점만 내놓은 것을 감안하면 트럼프 2기 산업·무역 정책이 구체적인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냈다는 분석이다. 트럼프발 리스크 확대에 국내 기업과 정부의 대응이 요구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대미 투자 확대 노렸나
러트닉 지명자는 이날 미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법 보조금 지급 계약을 이행하겠느냐”는 질문에 “내가 이행을 약속하기 위해서는 계약들을 읽고 분석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해외 반도체 기업에 고관세를 매기면, 미국에 공장을 지을 것”이라며 반도체 보조금 정책에 불만을 나타낸 데 이어 상무부 장관 지명자마저 보조금 지급을 장담할 수 없다고 밝힌 것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12월 19일 4억5800만달러(약 6600억원)에 이르는 직접 보조금과 최대 5억달러 규모 정부 대출을 약속받았고, 다음 날 삼성전자는 47억4500만달러 규모 보조금 지급 계약을 미 정부와 맺었다. 미 정부는 삼성과 SK 외에도 인텔, TSMC, 마이크론 등에 보조금을 약속했다.
앞서 바이든 정부에서 기업들이 약속한 것을 넘어서는 대가를 받아내기 위한 압박용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보조금 없이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협상을 위한 메시지일 수 있다”며 “보조금을 주지 않겠다기보다는 투자 규모 확대나 속도를 압박하는 용도로 보인다”고 했다.
◇자동차, 가전 등에도 영향
러트닉 지명자는 자동차와 관련해서도 그동안 현대자동차가 혜택을 받아왔던 리스용 전기차 보조금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끝내야 한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내놨다. 그는 “미국의 실패한 산업 정책 사례”라며 “바꿀 필요가 있으며 지금 바꿔야 한다”고 했다. 바이든 정부는 리스용 전기차에 대해선 현지 생산이라는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보조금 지급 요건의 예외를 인정했고, 현대차는 리스용을 중심으로 전기차 수출을 확대해왔다.
또 러트닉 지명자는 “일본의 철강, 한국의 가전 같은 경우 우리의 선량함을 이용했다”며 우리나라를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국내 제조업 전반으로 미국의 정책적 압박이 확대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부분이다.
미국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외국산 제품 수입을 제한하는 무역확장법 232조를 다시 꺼내 들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장상식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트럼프 1기 때에도 철강에 이어 232조를 자동차에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한 적이 있다”며 “주요 제품에 대한 현지 생산을 확대하도록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국내 제조업 공동화에 대한 대책 마련도 요구된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단장은 “R&D(연구·개발)나 첨단 기술은 국내에 두고, 단순 생산 위주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