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 문제다. 경영진부터 철저히 반성하고 ‘사즉생(死卽生·죽기로 마음먹으면 산다는 뜻)’의 각오로 과감하게 행동할 때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에 강도 높은 위기 메시지를 던졌다. 사업부별 문제를 조목조목 짚는 통렬한 비판과 함께 ‘독한 삼성인’이 될 것을 주문했다. 지난 2020년 이건희 선대회장 별세 이후, 5년간 삼성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이재용 회장이 그간의 조용한 행보를 깨고 이례적으로 강도 높은 메시지를 낸 것이다.
17일 삼성에 따르면, 이 회장은 임원들을 상대로 “전 분야에서 기술 경쟁력이 훼손됐다”며 “과감한 혁신이나 새로운 도전은 찾아볼 수 없고, 판을 바꾸려는 노력보다는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고 질책했다. 또 “21세기를 주도하며 영원할 것 같았던 30개 대표 기업 중 24개가 새로운 혁신 기업에 의해 무대에서 밀려났다”며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위기감을 토로했다. “인류의 미래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술 혁신이 지속되는 국가 총력전의 양상이 펼쳐지는데, 우리 경제와 산업을 선도해야 할 삼성전자는 과연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반성도 있었다. 이 회장의 이 같은 메시지는 지난달 말부터 삼성이 계열사 전 임원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 중인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 세미나에서 영상을 통해 전달됐다.
HBM(고대역폭 메모리) 등 AI(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실기(失期), TV·스마트폰 등 전 사업부의 부진 등 그간 삼성 안팎에서 ‘위기론’이 터져 나왔지만, 이 회장이 직접 위기 메시지를 낸 적은 없었다. 재계에선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0년 뒤를 생각하면 등에서 땀이 난다” 등 삼성이 어려울 때나 호황일 때나 한결같이 위기를 강조해온 이건희 선대회장을 연상케 한다는 반응도 나왔다.

◇“메모리는 자만, 파운드리는 기술 부족” 사업부마다 질책
“메모리 사업부는 자만에 빠져 AI(인공지능) 시대에 대처하지 못했다. 파운드리 사업부는 기술력 부족으로 가동률이 저조하다. DX 부문(TV·스마트폰 등)은 제품 품질이 걸맞지 않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최근 삼성의 상황을 사업부별로 조목조목 질책하며, 그룹에 강도 높은 위기 의식을 불어넣었다. 지난 2020년 이건희 선대회장의 별세로 그룹을 실질적으로 이끈 이후는 물론 2022년 회장 취임 당시에도 취임사조차 내지 않을 만큼 대내외 메시지를 자제해 온 이 회장의 이례적인 고강도 발언이다.
이건희 회장이 회장 취임 6년 만인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삼성 수뇌부를 소집해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을 발표했던 것처럼, 이재용 회장도 실질적으로 삼성을 이끈 지 5년이 되는 올해 심각한 위기의식과 함께 본격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날 삼성전자의 주가는 외국인과 기관의 매수세에 힘입어 전 거래일 대비 5.3% 오른 5만76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사업부 질책하며 ‘독한 삼성’ 강조
이 회장의 메시지는 지난달 말부터 경기도 용인 연수원에서 삼성 계열사 전 임원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 중인 세미나에서 전달되고 있다. 특히 메모리와 파운드리의 부진 원인과 함께 TV·가전·스마트폰 등의 품질 문제가 직접적으로 거론되자 임원들이 앉아 있는 강연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 근무하는 부사장급 이하 임원들을 모두 불러 이 같은 메시지를 현장에서 직접 듣게 하고 있다. 앞서 삼성은 연초에 사장단을 대상으로도 같은 메시지를 공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용 회장은 영상을 통해 삼성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으며 “위기 때마다 작동하던 삼성 고유의 회복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간 고비 때마다 삼성을 위기에서 구했던 특유의 ‘삼성 DNA’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사업 면에서 삼성의 경쟁력은 매년 떨어지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가 공시한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TV부터 스마트폰, D램, 스마트폰 패널, 차량용 디지털 콕핏(cockpit·운전석)에 이르기까지 주요 사업 부문의 점유율은 모두 하락했다. TV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23년 30.1%에서 지난해 28.3%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스마트폰은 19.7%에서 18.3%로, D램은 42.2%에서 41.5%로 하락했다. 스마트폰용 디스플레이 패널(50.1%→41.3%), 디지털 콕핏(16.5%→12.5%)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부 결속력도 약해지고 있다. 삼성 경영진은 주 52시간제 때문에 밤이 되면 연구실 불이 꺼진다며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포함한 반도체특별법 통과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노조는 ‘노동 시간을 줄이고 워라밸을 높이는 게 글로벌 트렌드’라며 이에 반대하고 있다. 지난해엔 삼성전자 창사 이래 첫 파업도 벌어졌다. 과거처럼 미국·일본과의 30년 기술 격차를 따라잡겠다며 뛰어들었던 경영진과 직원들의 무모한 도전 정신도 실종됐다. 2016년 국정 농단 사건에서 시작된 ‘사법 리스크’도 삼성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신상필벌 철저, 수시 인사하라”
이재용 회장은 이 같은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최근 사장단에게 “성과를 확실히 보상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신상필벌이 원칙”이라며 “필요하면 인사도 수시로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4일 갤럭시 스마트폰 개발을 주도해 온 최원준 MX(모바일)사업부 개발실장이 사장으로 승진한 ‘원포인트 인사’가 이뤄진 것도 이 같은 배경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이번 영상에서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라며 “경영진보다 더 훌륭한 특급 인재를 국적과 성별을 불문하고 양성하고 모셔와야 한다”고 했다. 과거 ‘S급 인재’ 영입에 사활을 걸었던 이건희 회장의 ‘인재제일’ 가치를 재차 상기시킨 것이다.
이 회장은 임원들에게 “중요한 것은 상황이 아니라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라며, 임직원들이 ‘삼성다움’이란 가치로 다시 정신 무장할 것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은 이번 세미나에 참석한 임원들에게 ‘위기에 강하고 역전에 능하며 승부에 독한 삼성인’이란 글귀를 새긴 명함 크기의 수정패를 하나씩 나눠줬다.
◇이건희 회장처럼 본격 쇄신 나서나
재계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강도 높은 위기 메시지가 수시로 위기의식을 강조했던 고 이건희 선대회장의 발언을 연상케 한다는 말도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참석자는 “이건희 회장이 제품 불량이 난 휴대폰 15만대를 불태웠던 ‘애니콜 화형식’, 지금 변하지 않으면 삼성뿐 아니라 나라가 2류, 3류로 떨어질 것이라고 위기를 강조했을 때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실제로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이끌면서 직접적인 어조로 ‘위기’를 강조해 왔다. 2002년 전자 계열사 사장단을 모아 놓고 “5년, 10년 후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가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고 토로한 것을 비롯해, 지난 2010년 경영에 복귀할 때는 “앞으로 10년 내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다. 지금이 진짜 위기”라고도 했다. 창업 이래 최대 실적을 냈던 2013년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도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고 했을 정도다.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한 것은 아버지인 이병철 창업회장이 별세한 1987년으로부터 6년이 지난 1993년이었다. 이 회장은 당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과 함께,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총 8개 도시를 돌면서 임직원 1800여 명과 함께 350여 시간의 토의를 진행했다. 이후에도 1995년 ‘애니콜 화형식’, 1996년에는 원가·경비 30%를 3년간 절감하는 ‘경비 330운동’을 펼치는 등 강도 높은 쇄신을 이어 갔다.
이재용 회장도 이건희 회장이 별세한 지 5년이 되는 올해 심각한 위기의식과 함께, 임원 2000여 명을 모아놓고 본격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이 이번 메시지를 ‘제2의 신경영 선언’ 삼아 그룹 컨트롤타워 부활 등 본격적인 쇄신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삼성은 그간 숱한 위기의식에도 불구하고, 과거 국정 농단 사건에 그룹 컨트롤타워였던 ‘미래전략실’이 연루됐던 트라우마 때문에 컨트롤타워 복원 등 변화를 제대로 시도하지 못했다. 최근 최윤호 사장을 수장으로 한 경영 진단 기능을 부활시켜 반도체 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에 착수했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다는 것이 삼성 안팎의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