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코드(decode): 부호화된 데이터를 알기 쉽도록 풀어내는 것. 흩어져 있는 뉴스를 모아 세상 흐름의 안쪽을 연결해 봅니다.

많은 국내외 전문가들이 최근 ‘시스템반도체의 게임의 룰’이 바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에 대한 인식을 정확히 해야만, 삼성전자 시스템반도체 1등 전략의 방향을 논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6개월 전인 작년 10월 29일자로 제가 쓴 ‘[최원석의 디코드] 삼성이 대만 TSMC를 이기기 어려운 5가지 이유’의 속편입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3/0003572280

이 글을 읽어보시고 6개월이 지난 현재 상황과 비교해 보셔도 좋고요. 물론 아래 글만 따로 읽으셔도 좋습니다. 6개월 전 글이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1등 전략이 쉽지 않은 이유를 쓴 것이었다면, 오늘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려면 무엇이 꼭 필요한가’를 3가지로 정리한 것입니다. 3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시스템반도체의 게임의 룰’이 바뀌는 흐름을 잘 타서, 파운드리의 첨단 패키징에서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2. 대만의 미국·일본 반도체 생태계 끌어안기가 최대 위협... 우리도 모든 수단 동원해 오픈 이노베이션에 나서야 한다

3. ‘시스템반도체를 지원한다’는 국가 전략이 될 수 없다... 대만처럼 선택·집중의 효과적 그랜드스트래티지 세우고, 그에 맞게 육성전략 짜야

그러면, 삼성 그리고 한국이 시스템반도체 부문에 어떤 전략을 취해야 우리 반도체산업이 생존하고 또 지속성장할 수 있을지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서울=뉴시스]홍효식 기자 = 삼성전자가 2021년 1분기 잠정 실적 발표를 통해 연결기준 매출 65조원, 영업이익 9조30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힌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삼성은 디스플레이 비수기와 반도체 실적 감소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과 소비자가전 부문의 수익성 개선으로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올랐다.2021.04.29. yesphoto@newsis.com

본론은 말씀드리기 전에 시스템 반도체의 개괄과 현재 상황을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반도체 상식이 풍부한 분은 아래 내용을 스킵하고, 본론 1번으로 넘어가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시스템반도체는 메모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반도체를 의미합니다. 메모리 1등 국가인 한국에선 시스템반도체를 ‘비(非)메모리 반도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 표현은 좀 그렇죠. 메모리보다 시스템반도체 시장이 두배 이상 크고, 성장 가능성도 더 높기 때문입니다.(현재 시스템과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는 7대 3 정도)

메모리 부분을 먼저 정리하고 넘어가죠. 메모리 양대산맥인 D램과 낸드플래시 가운데, 세계시장 점유율이 D램의 경우 삼성이 40%, SK하이닉스가 30%로, 한국이 70%를 차지합니다. 낸드플래시는 삼성이 30%대, SK하이닉스가 10%대로, 대략 절반을 한국이 차지합니다. 철옹성이었던 삼성의 메모리 부문을 최근에 미국 마이크론이 치고들어올 조짐을 보이는게 걱정이지만, 일단 한국의 전략은 ‘수성(守城)’입니다. 우리가 1등이니까요.

그럼 시스템반도체 얘기로 넘어갑니다. 최종 제품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단계로 구분해 볼게요.

우선 팹리스(Fabless)가 있습니다. 팹(Fab) 즉 생산공장 없이 설계만 하는 회사들입니다. 스마트폰 등에 들어가는 AP(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의 강자 퀄컴, PC(개인용컴퓨터) 등에 들어가는 CPU(중앙처리장치) 회사인 AMD, GPU(그래픽처리장치) 강자인 엔비디아 등이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아시아 1등 팹리스 하이실리콘(화웨이 계열)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그리고 이런 팹리스로부터 설계를 받아 대신 생산해주는 파운드리(Foundry·반도체수탁생산업체)가 있습니다. 1987년 설립된 대만 TSMC가 창출한 분야로 현재까지도 TSMC가 독보적인 1위입니다. 세계시장의 절반을 차지할 뿐 아니라, 특히 돈 되는 첨단공정을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죠.

인텔·삼성전자로 대표되는 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종합반도체기업)도 있지요. 설계(팹리스)·생산(파운드리)을 혼자 다 하는 회사입니다. 옛날엔 주요 기업이 이를 전부 다 했지만, 지금은 인텔·삼성 정도를 빼고는 다들 팹리스에 집중해 수익력을 극대화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TSMC가 등장해 워낙 효율적으로 일한 탓도 있고, 또 반도체 제조공정이 복잡해지고 돈이 너무 들어가면서 다들 생산을 외주화한 것이죠.

그럼 이런 배경지식을 깐 상태에서 삼성전자를 살펴봅니다. 우선 메모리. 최근 마이크론, SK하이닉스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확고한 1등입니다. 앞으로도 초격차 전략으로 1등을 유지하는 것만이 살길이죠. 이번엔 논의하지 않겠습니다. 시스템반도체가 주제이니까요.

그럼 삼성의 시스템반도체 전략을 살펴볼게요.

삼성은 앞서 말씀 드린 파운드리에서 TSMC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현재 세계시장 점유율 20% 정도로 TSMC에 이어 2위입니다. 확고한 2위이긴 하지만, 1위 TSMC와 격차를 줄이는게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다음은 CPU·AP 분야입니다. 삼성은 PC 등에 들어가는 CPU를 설계하지 않습니다. 이 시장은 삼성을 포함해 한국이 차지하는 부분이 없고 앞으로도 생길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다음은 AP인데요. 스마트폰 등 모바일기기의 두뇌 역할을 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삼성 지위는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자체 AP인 엑시노스 시리즈를 직접 설계하고 있지만, 아직은 자사 모바일 제품 일부에만 쓰이는 실정이죠. 애플 제품은 애플이 직접 설계해 TSMC가 생산하고, 각 회사 모바일기기에 쓰이는 범용 AP는 퀄컴의 스냅드래곤 시리즈 등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삼성의 자동차용 AP가 해외 자동차회사의 차량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용으로 일부 납품되긴 하지만, 자율주행까지의 발전을 염두에 둔 주행보조 시스템용 AP는 수요 개척이 잘 안되는 상황입니다.

삼성은 또 시스템반도체의 주요 제품 중 하나인 이미지센서에서도 업계 2위입니다. 작년 세계시장 점유율은 소니가 46%, 삼성전자가 29%였습니다.

그럼 삼성의 현재 위치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시스템반도체와 함께 반도체산업의 양대 산맥인) 메모리는 확고한 세계 1위

-시스템반도체의 주력인 CPU·AP 분야에서는 아직 마이너

-CPU·AP에는 미치지 못하나 시스템반도체의 또 하나의 주력으로 계속 시장이 커질 전망인 이미지센서에선 세계 2위

-파운드리, 즉 고객사의 설계대로 시스템반도체를 대신 생산해주는 사업에서는 세계 2위

자, 그럼 삼성의 향후 전략은 어떻게 될까요? 혹은 2030년 시스템반도체(파운드리 포함) 매출 세계 1위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아보이는 전략은 무엇일까요? 시스템 반도체 각 분야를 충분히 이해한 뒤에 생각해야만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앞서 AP(CPU는 어차피 안되니까 제외)의 경우, 삼성이 하고는 있지만 아직 마이너라고 말씀드렸죠? 반면 파운드리와 이미지센서는 세계 2위입니다.

우선 이미지센서의 전략입니다. 볼 것도 없습니다. 1등 소니를 잡아야 합니다. 작년 기준 소니 점유율이 46%, 삼성이 29%로, 삼성이 종전보다 격차를 계속 줄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미지센서 시장은 현재 연간 20조원 수준이지만, 2024년에는 30조원, 그 이후로도 성장이 예상됩니다. 현재는 스마트폰카메라에 가장 많이 들어가지만, 자율주행차·사물인터넷 시대가 오면 수요가 폭발할 수 있죠. 게다가 최근에는 이미지센서만이 아니라, 여기에 AI반도체를 붙여 성능을 극대화한 고부가치 제품이 소니를 필두로 증가 추세입니다. 삼성은 AI반도체 설계능력과 생산능력을 모두 보유하고 있고, 또 스스로 자사의 최종제품에 붙여 활용할 곳도 많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소니와의 격차 줄이기, 장기적으로는 역전도 노려볼 수 있겠죠.

그럼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겁니다. ‘현재 마이너 위치인 AP에서 삼성이 시장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냐' 그리고 ‘업계 2위인 파운드리에서 최강자인 TSMC와의 격차를 좁히거나 혹은 역전이 가능하겠느냐'이겠죠. 삼성이 만약 2030년까지 이미지센서에서 소니를 제치고 1등이 된다면, 2030년 시스템 1등 달성에 꽤 큰 역할을 하긴 하겠지만, 그걸로는 역부족입니다. 시스템반도체 시장 전체로 보면, 이미지센서는 10분의 1 규모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P와 파운드리 양쪽의 사업확대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시스템반도체의 핵심인 CPU는 인텔·AMD 등이 넘사벽이죠. AP에서도 아직 삼성의 존재감은 낮습니다. 파운드리 분야는 글로벌 2위이지만, 고부가가치 위주로 전체 시장 절반을 장악한 TSMC가 너무 막강해보입니다.

그럼 삼성이 2030년에 시스템반도체 매출로 세계 1등을 하겠다는 전략은 허황된 것일까요? 팹리스는 퀄컴 같은 업계 최강자가 넘사벽이고, 파운드리에선 TSMC에 밀리니까 불가능한 일일까요?

글쎄요.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시스템반도체의 게임의 룰’이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스템반도체 시장의 질서가 ‘지금 이대로 영원히’라면 아마 삼성이 9년 뒤에 시스템반도체 1등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요. 시스템반도체에 수십년에 한번 올까말까 한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만약 삼성이 이 새로운 질서를 최대한 활용한다면, 2030년 시스템반도체 1등도 꿈만은 아닐겁니다.

그럼 지금부터 삼성, 혹은 대한민국의 시스템반도체 전략이 성공하기 위한 3가지에 대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YONHAP PHOTO-1468> FILE PHOTO: FILE PHOTO: FILE PHOTO: A logo of 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 (TSMC) is seen at its headquarters in Hsinchu, Taiwan August 31, 2018. REUTERS/Tyrone Siu/File Photo/File Photo/File Photo/File Photo/2021-05-05 08:59:59/ <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1. ‘시스템반도체의 게임의 룰’이 바뀌는 흐름을 잘 타서, 파운드리의 첨단 패키징에서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삼성의 시스템반도체 1등이 가능할 것인지를 살펴보려면, 먼저 ‘시스템반도체 게임의 룰’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삼성이 팹리스에서 궁극의 목표로 삼는 퀄컴의 위치가 조만간 위험해 질 수 있고, 이 때문에 천하의 퀄컴조차 본인들의 업의 형태를 바꿀 수도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성이 시스템반도체에서 AP를 열심히 개발해 퀄컴을 따라가겠다는 것은 시작부터 넌센스일 수 있다는 겁니다.

최근 추세를 보시면, 하나의 칩을 개발해 전세계가 보편적으로 쓰는 ‘유니버설 프로세서’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현재 모델은 이겁니다. 퀄컴이 칩을 하나 만듭니다. 그리고 전세계 고객에게 “제가 이런 멋진 칩을 만들었어요. 이걸 대량으로 구입해 고객님 제품이나 서비스에 쓰시면 됩니다”라고 얘기했죠. 퀄컴이 범용칩을 설계해 내놓으면 전세계 고객사가 사서 쓰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델이 바뀌고 있는 겁니다. 구글·페이스북·아마존을 예로 들어보죠. 이들이 그런 범용칩 사용을 거부하고, 직접 칩을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이들은 앞으로 자신들의 서비스 플랫폼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서버용의 고성능 AI반도체가 대량으로 필요한데요.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범용칩을 쓰니까 우리가 의도한 최적의 성능이 안나오는 것 같아. 역시 우리 서비스에 최적인 AI 반도체는 우리가 직접 만들어야 되겠어”인 거죠.

그럼 팹리스에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아니야, 우리 칩이 당신들 서비스에 100% 최적화돼있진 않지만, 최첨단 미세공정으로 만들어서 기본 성능이 끝내준다구. 그냥 우리꺼 써”라고요.

그런데 제아무리 최고의 설계기술을 반영해 초미세공정으로 만든다고 해도, 즉 기본성능이 좋다고 해도, 모든 특정서비스에서 그 성능이 발휘되는건 아니지요. 또 미세공정은 조만간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현재 TSMC가 5나노의 안정적인 양산, 3나노 준비중, 삼성전자가 5나노 양산, 3나노 준비중으로 파운드리 1·2위 회사가 치열하게 미세공정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일단 공정 한 단위 올릴 때마다 수십조원씩 투자해야할만큼 부담이 어마어마하고요. 그렇게 하더라도 2나노, 정말 짜내봐야 1나노까지입니다. 그보다 더 미세하게 회로를 그리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단위 면적당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어, 성능은 높이고 전력소모를 줄이는 일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됩니다. 반면 구글·페이스북·아마존을 필두로 앞으로 프로세서를 대량 소비할 고객사들은, 폭발하는 빅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지금보다 훨씬 더 성능이 좋은 AI반도체가 절실합니다. 그것도 너무 비싸지 않은 값에 말이죠.

약간 부정확하긴 합니다만, 이렇게 예를 들어보면 어떨까요? 거대 IT기업들이 굴곡이 많은 정해진 트랙을 자동차로 한시간에 100바퀴 돌다가 이제는 200바퀴 돌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보죠. 미세화공정으로 반도체 전체 성능을 높이는 것은, 자동차 엔진을 100마력에서 200마력, 300마력으로 높이는 것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거죠. 효과는 있습니다. 그런데 엔진 출력을 크게 높이려면 돈이 많이 듭니다. 그런 힘을 감당하기 위해 차량 전체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또 돈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 트랙의 코너를 빨리 도는 방법이 꼭 엔진 출력을 크게 높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죠. 차량 무게를 가볍게 한다든지, 또는 변속기·서스펜션을 고객이 사용하는 특정한 트랙의 형상에 최적화함으로써, 더 저렴한 비용에 더 효율적으로 트랙을 더 빨리 도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미세공정의 한계라는 것은 엔진출력을 더 이상 높이지 못하게 됐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 말고, 각각의 부품을 디테일하게 조정함으로써 돈을 덜 들이고 더 나은 성능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죠.

이걸 위해 시스템반도체 설계에 기술적 변곡점이 나타나고 있는데,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이종집적 즉 헤테로지니어스 인티그레이션(Heterogenous Integration)’이라는 개념입니다. 여러 개의 서로 다른 칩들을 가까이에 집적해서 서로간의 연결에서 최고의 효율을 내도록 만들면, 성능이 개선되고 소모전력도 줄일 수 있다는 컨셉이죠. 예를 들면, 어떤 하나의 반도체가 5나노 공정으로 만들어져 최고 성능을 낸다 하더라도, 어차피 다른 반도체와 신호를 주고받아야 일을 할텐데요. 다른 반도체가 이를 못받쳐주거나 혹은 신호전달에서 병목현상이 생기면 전체적으로는 원하는 시스템 성능이 나오지 않겠지요.

그래서 서비스 플랫폼을 가진 IT회사들이 아예 이 시스템 전체를 자신들의 서비스에 최적화할 수 있도록 직접 설계하겠다는 것인데요. 이 때 점점 더 각광받을 기술이 바로 이종집적(Heterogenous Integration) 설계라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퀄컴도 지금처럼 자신의 범용칩을 대량으로 파는게 점점 어려워질 수 있고요. 각각의 IT업체들이 자신들의 서비스 가치에 최적이 되도록 각각의 반도체를 어떻게 통합 배치하고 그것을 더 효율적으로 연결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퀄컴도 알아서 대비하고는 있겠지만, 전통적인 팹리스 역할이 축소되고, 지금 팹리스의 기능 상당부분이 거대 IT회사로 이관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즉 기본 설계는 점차 표준화돼 여러 개의 레고블럭처럼 바뀌고, 구글·아마존·페이스북이 자신들 서비스에 필요한 레고블럭을 가져다 독자칩을 스스로 설계하는 식으로 바뀌어 갈 것이라는 얘기죠. 즉 퀄컴·엔비디아·AMD 같은 곳만 팹리스인게 아니라, IT업체 스스로도 팹리스 기능을 겸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삼성이 설계한 칩을 전세계에 팔 수 있을까요? 퀄컴 같은 최고의 팹리스가 설계한 칩도 앞으로 입지가 줄어들 수 있다는데, 삼성이 어떻게 이걸로 승부를 낼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반도체 기술의 이런 변곡점을 AP 설계가 아니라 파운드리의 관점으로 보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거대플랫폼을 가진 IT회사들이 각자 설계한 칩을 쓰는 일이 확대될 때, TSMC·삼성이 주도하는 파운드리 비즈니스에 또한번 엄청난 기회가 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미세화공정이 한계에 부딪치면서, 각각의 기능을 가진 10개, 20개의 칩을 하나로 통합 설계하는 방식이 대안으로 나오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때에 중요한 것이 바로 파운드리의 차세대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는 ‘첨단 패키징’입니다. 즉 IT업체들이 각각의 레고블럭을 연결한 설계로 칩을 만들어달라고 했을 때 이를 제대로 만들어주려면 꼭 필요한 기술이라는거죠. 이것에 대해 삼성도 그 심각성을 잘 알고 있다는 정황을 하나 보여드릴게요.

이재용 부회장은 충남 온양에 있는 삼성전자 패키징 연구소를 재작년 8월과 작년 7월 등 2년 연속 방문했습니다. 1년에 두번이나 갔습니다. 첫번째는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이후 경영대책 회의, 두번째는 삼성 반도체의 중장기 전략 점검이 이유였죠. 두번 다 매우 중요한 상황이었는데요. 이 때마다 이 부회장이 온양을 찾은 것은 반도체에 대한 예전 상식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패키징이란, 제조한 반도체의 겉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포장’하고 반도체 회로의 선을 외부로 이어주는 작업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성능을 좌우하는 것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둥근 원판인 ‘웨이퍼’에 미세한 회로를 그려내는 선(先)공정에 달려 있지, 패키징 같은 단순 포장 개념의 후(後)공정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당시 미국 대형반도체 회사의 한 임원은 제게 “온양 사업장은 이전엔 삼성 총수가 방문했던 적이 없는 일종의 변방이었다”면서 “온양을 1년사이 2번이나 찾았다는 것은 삼성 파운드리의 미래가 패키징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이 의미를 크게 해석했습니다. 첨단 패키징은 기존의 반도체 포장·배선(配線) 수준이 아니라, 극단적 미세화를 추구하지 않더라도 여러 기능을 가진 반도체를 하나로 이어붙여 그 이상의 성능을 뽑아내는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CPU(중앙처리장치), GPU(그래픽처리장치), 모뎀, 메모리 등의 서로 다른 반도체를 기판 여기저기에 갖다 붙이는게 아니라, 하나의 반도체처럼 연결함으로써, 모든 반도체를 고성능으로 만들지 않아도 시스템 전체로 보면 더 높은 성능을 뽑아내는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미국 주도의 이종집적(Heterogeneous Integration) 설계를, 생산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큰 변화가 첨단패키징에 있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각각의 기능을 가진 작은 반도체 조각(chiplet)을 퍼즐처럼 맞춘다는 의미에서 칩릿 기술, 혹은 다른 성격의 칩을 통합시킨다고 해서 (원래는 설계에서 나온 것이지만, 생산 측면의) 이종집적(Heterogeneous Integr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특히 예전에는 웨이퍼에 회로를 그린 다음에 그것을 자른 뒤 패키징을 했지만, 이제는 미세한 회로를 그리는 단계 즉, 웨이퍼 단계에서 각각의 칩을 패키징하는 최첨단 기술이 일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패키징을 후(後)공정이라 부르기도 어렵게 됐습니다. 첨단 패키징은 웨이퍼에 회로를 그리는 선(先)공정 단계에서 대부분의 작업이 끝나기 때문이지요.

이 때문에 산업통상자원부도 지난 1월 반도체 첨단패키징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새로 지정하고 기술보호에 나섰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시스템반도체용 첨단 패키징 세계시장은 2018년 270억달러에서 2025년 650억달러(약 73조원)로 연평균 14% 가량 성장할 전망입니다. 작년 12월 반도체 디바이스 관련 최고 권위의 국제학회인 ‘IEDM’ 세미나에서는 41개의 기술세션에 232건의 발표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가장 많이 그리고 중요하게 다뤄진 것이 첨단 패키징이었습니다. 일본 반도체 전문가 유노가미 다카시 미세가공연구소장은 이를 두고 “반도체산업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면서 “진화 속도가 늦어지고 있는 미세화공정 이후의 반도체 제조기술은 첨단패키징이 이끌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삼성이 TSMC와의 파운드리 경쟁에 올인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 그리고 삼성 반도체의 수장인 김기남 부회장이 “파운드리 부문의 분사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 것의 이유가 설명이 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시스템반도체의 가장 큰 전쟁터가 바로 이종집적 설계를 바탕으로 한 첨단 패키징, 즉 차세대 파운드리 기술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이병훈 포스텍 전자전기공학과 교수는 “실리콘밸리 IT 대기업마다 맞춤형 반도체를 만들기 시작하면, 설계만 하는 전문업체 영역이 줄어드는 대신에, 각각의 반도체를 고객이 원하는대로 이종집적하는 것이 훨씬 중요해진다”면서 “그렇게 되면 TSMC나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첨단패키징이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성전자는 당면의 초미세화 공정에서 TSMC에 절대 밀리면 안되죠. 그래서 여기에 전사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 다음 레벨인 첨단패키징에서, 기존 파운드리 영역을 넘어서는, 즉 설계 개념의 변화와 맞물린 더 큰 시장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반도체 업계의 큰 기술 흐름이 삼성의 시스템반도체 1등 전략의 핵심이 파운드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 TSMC는 현재의 미세화공정에서만 1등이고, 이런 이종집적 설계 흐름에는 뒤쳐질 수 있는 걸까요? 그래서 파운드리의 넥스트 레벨에서는 삼성전자가 1등을 엿볼 수 있는걸까요?

불행히도 아직까지는 이 역시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TSMC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흐름을 궤뚫고 삼성전자보다 먼저 준비해 나가고 있거든요. TSMC는 현재도 이 같은 첨단 패키징 분야 시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TSMC는 지난 10년간 ‘팬아웃 웨이퍼레벨 패키징(FOWLP)’이라는 기술을 발전시켜 왔는데, 웨이퍼 단계에서 여러 칩을 한꺼번에 집어넣어 최적의 성능을 뽑아내는 것입니다. 둥그런 웨이퍼 위에서 모든 패키징을 완료한 뒤 사각형 칩으로 잘라내는 방식이죠. 정밀도를 높일 수 있지만, 잘못하면 버리는 부품이 많아지는 단점이 있는데요. TSMC가 이를 기술력으로 극복해 현재 시장 표준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반면 삼성은 ‘팬아웃 패널레벨 패키징(FOPLP)’에 주력하고 있는데 TSMC가 쓰는 웨이퍼보다 훨씬 큰 패널 위에 각각의 기능을 가진 반도체를 이어붙이는 방식입니다. 성공만 하면, 굳이 초미세공정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TSMC 방식보다 더 저렴한 원가에 더 대량으로 고성능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술적 완성도 면에서 TSMC의 방식에 미치지 못해, 아직까지 전세 역전의 기회를 엿보는 중입니다.

즉 TSMC와 삼성전자가 갈고닦고 있는 이런 첨단 패키징 기술은 결국 이종집적 설계가 계속 발전돼 나가는 과정에서 파운드리가 이를 대비하고 그 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출발점 혹은 기반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삼성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메모리 세계 1위, 이미지센서 2위, 그리고 AP설계·생산 경험, 그리고 이를 스마트폰 등 최종제품에 반영해 대량 판매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TSMC가 설계능력이 없어서 생산에만 특화한 건 아니지만(TSMC처럼 파운드리 1등이 되려면 자체 설계능력을 보유해, 생산을 맡기러 오는 팹리스를 설계에서도 지원해줄 실력이 돼야 합니다), 아무튼 삼성이 가진 종합적 능력이 첨단 패키징에서도 강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살짝 다른 얘기입니다만, 원래로 치면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를 분사하는게 맞거든요. 왜냐하면 TSMC처럼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전략을 분명히 해야만, 스마트폰 회사들이 삼성에 스마트폰 AP를 믿고 맡길 수 있을테니까요. 자신들 기밀이 삼성 파운드리를 통해 새어나와, 삼성 스마트폰 사업부로 가지 않도록 말입니다. 반면에 TSMC는 오로지 파운드리만 하니까, 고객이 걱정할 이유가 적습니다. TSMC의 철칙 중 하나가 고객 비밀 유지입니다. 즉 같은 TSMC 직원이라도 퀄컴 반도체 생산라인의 엔지니어와 애플 반도체 생산라인의 엔지니어가 서로 말도 섞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삼성전자 반도체를 이끄는 김기남 부회장은 “파운드리를 분사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이런 기술적 흐름으로 설명이 됩니다. 즉 분사를 하기엔 앞으로 파운드리가 뻗어나갈 분야가 너무 많은거죠. 그리고 파운드리가 미세화 공정 싸움에 이어 첨단 패키징 싸움으로 가게 되면, 거의 모든 부문의 전문인력과 기술이 동원되는 총력전이 될 것이기 때문에, ‘올 삼성’ 전략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즉 삼성이 파운드리를 분사해서 얻을 이익보다, 분사하지 않고 총력전으로 TSMC와 붙는게 장기적으로 승산이 더 있다고 봤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플랫폼을 가진 IT기업들이 전부 이종집적 설계 개념의 반도체, 즉 초고난도 실력이 필요해 첨단패키징의 모든 기술을 구사해야 하는 반도체 생산을 위탁해 올 때, 그 과실을 삼성이 많이 따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삼성은 구글·페이스북·아마존과 경쟁하지 않으니, 이런 거대기업들이 독자 반도체의 생산을 맡겨온다 해도, 삼성이 파운드리를 분사하지 않아 생기는 단점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또 이종집적 설계에 따른 첨단패키징이 일반화되면, 삼성전자가 지금의 팹리스만 갖고 있는 영역으로 일부 진출하는 것도 가능해질지 모릅니다. 구글·페이스북·아마존이 자신들 서비스에 맞는 반도체를 설계한다 해도, 그런 설계는 워낙 복잡하고 많은 노하우를 필요로 할 테니까요. 삼성이 이런 첨단패키징을 포함해 이종집적 설계 지원 서비스를 확대함으로써, 삼성의 팹리스 능력까지 자연스럽게 강화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미국의 인텔과 대만의 tsmc/연합뉴스

◇2. 대만의 미국·일본 반도체 생태계 끌어안기가 최대 위협... 우리도 모든 수단 동원해 오픈 이노베이션에 나서야 한다

정리하면, 결국 파운드리가 한국 시스템반도체 성장의 돌파구이기 때문에, 삼성은 TSMC와 미세화 공정뿐 아니라,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첨단 패키징에서 TSMC와 싸워 이겨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첨단패키징에서도 지금은 TSMC가 이기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TSMC의 패키징 기술이 더 위협적일 수 있는 큰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TSMC가 첨단 패키징 소재·장비 기술력이 높은 일본, 패키징 설계 관련 고급기술력이 높은 미국과 연구개발 생태계, 첨단 패키징 기술의 삼각(三角)동맹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TSMC가 첨단 패키징 시장을 리드해 왔지만, 문제는 앞으로입니다. TSMC는 기술의 미래를 잘 알기 때문에, 더 해야 할 것이 많고, 그렇기에 기술력 부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많이 알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셈이죠.

그래서 TSMC가 끌어들인 것이 일본입니다. 물론 이는 미국이 중국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일본은 첨단 패키징 소재·장비 분야에서 세계 톱입니다. 미세화공정 핵심 장비에서는 네덜란드의 괴물기업 ASML에 시장을 완전히 빼앗겨 체면을 구겼지만, 첨단 패키징 분야에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 중입니다. 대만과 일본의 첨단 패키징 연구개발 생태계는 TSMC가 지난 2월 설립을 발표한 일본 쓰쿠바의 반도체 패키징 연구센터가 맡을 전망입니다. 이미 TSMC는 2019년에 첨단 패키징을 포함하는 설계기술 개발을 위해 도쿄대의 ‘d.lab’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번에는 일본 업계와의 협력 거점을 만든 셈이지요. 또 일본은 쇼와머티리얼 등 패키징 기업 18개사가 ‘조인트(Joint)’라는 이름의 첨단 패키징 컨소시엄을 만들었는데요. 일본 화학공업일보는 지난달 8일자 기사에서 “조인트와 TSMC의 제휴가 기대된다”고 썼습니다. 일본과 대만 정부도 이런 제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지요. 즉 양국 정부 지원 아래, TSMC는 첨단 패키징 분야에서 가장 풍부한 인력을 자랑하는 일본의 기술 기반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작년 말에 네덜란드 출장을 갔었죠. 미세화공정의 핵심인 EUV 노광장비를 100% 독점공급하고 있는 네덜란드 기업 ASML의 경영진을 만나러 간 것이었습니다. 당시 TSMC가 대당 2000억원이나 하지만 물건이 없어 못구하는 이 장비를 거의 싹쓸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장의 초미세화공정에서 TSMC에 맞서기 위해 삼성의 총수가 협력업체 본사로 직접 날아간 것이었죠. 이 회장은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 한가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조만간 일본도 다시 가야 할 것 같다”고요. 이것은 ASML이 EUV 노광장비를 더 빨리 많이 만들어내도록 하는 열쇠를 일본의 소재·장비업체가 쥐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초미세화 공정 이후 그 다음 단계의 승부처인 첨단 패키징에서도 일본의 소재·장비 업체들이 높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파운드리의 미래와 관련한 협력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TSMC가 미국 애리조나에 짓기로 한 공장도 우려됩니다. 미국 정부가 30억달러를 보조하는 것도 크지만, 지원은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인텔 등과의 첨단 패키징 기술협력도 예정된 수순입니다. 고급기술은 있으나 실제 생산기술이 부족한 인텔이 생산기술이 강한 TSMC와 제휴할 가능성이 있는데요. 이 과정에서 TSMC가 미국 주도로 발전하고 있는 이종집적 설계, 그리고 첨단패키징에 대한 고급기술을 일부 흡수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반도체는 미국에서 나온 것입니다. 파운드리에서 대만·한국에 밀렸다고 해서 첨단패키징에 관한 원천 기술 자체가 없는게 아니거든요. 이것의 기반이 되는 이종집적 설계 로드맵은 당연히 미국이 주도하고 있고요.

TSMC의 미국 신공장은 인텔의 반도체 생산거점인 애리조나주 챈들러(Chandler)시에 들어서는데요. 이 역시 의도된 것이지요. TSMC 신공장 건설은 미국에서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상무부가 아니라 국방부가 많이 관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텔 역시 국방부와의 관계가 깊지요. 인텔은 미 국방부가 주도하고 있는 클라우드 구축 프로젝트 ‘제다이(JEDI·Joint Enterprise Defense Infrastructure)에 깊이 관여돼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국방부 데이터 대부분을 제다이에 격납해 인공지능(AI)을 사용한 분석으로 전투를 지원하는게 목적입니다. 중국과의 하이테크 전쟁에 대비한 측면도 있지요. 직접 예산만 100억 달러가 넘습니다. 프로젝트 자체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수주했지만, 여기 사용되는 엄청난 양의 서버는 인텔이 제공합니다.

인텔은 작년 10월부터 시작된 미 국방부 주관의 ‘SHIP(State-of-the-art Heterogeneous Integration Prototype)’ 2차 프로그램에 참가해 이것만으로 1억달러 이상의 보조금을 받았습니다. 미 정부가 자국 내 반도체 제조기술을 발전시킨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여러 프로그램 중 하나인데요. 여기에 ‘이종집적 프로토타입(Heterogeneous Integration Prototype)’이라는 단어가 보이시죠? 간단히 말하면 인텔의 반도체 첨단패키징 기술 고도화에 국가적 지원이 쏟아지는 상황의 일부를 보여줍니다. 인텔은 현재 미세화공정에서 TSMC나 삼성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죠. 미세화공정도 따라가는 중이지만, 이것만으로는 파운드리 분야에서 인텔이 판세를 뒤집을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인텔 역시 자신들이 강한 이종집적 설계 기술에다, 앞으로 생산기술을 접목해 파운드리 경쟁력을 점프시킬 계획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럴 경우, 첨단 패키징의 양산 기술력으로 세계 최고인 TSMC와 인텔이 협력한다면 어떨까요? 인텔의 제조거점인 애리조나 챈들러 지역의 일원이 된 TSMC 공장을 통해 장기적 파트너십을 맺을 수도 있겠지요. TSMC로서는 인텔이나 미국 정부와 협력하면서, 그에 상응한 시장 혹은 TSMC가 못가진 첨단패키징 관련 고급기술을 미국 정부의 전폭 지원 아래, 인텔이나 다른 산학계로부터 흡수할 수도 있겠지요.

따라서 한국의 반도체 전략을 생각할 때, 미국이 한국과 대만을 바라보는 지정학적 대전략의 변화를 외면하는건 불가능합니다. 과거 일본 반도체의 사례를 봐도 그렇습니다. 일본은 1980~1990년대 세계 반도체 업계를 주도했습니다. 한국은 반도체 전체에서 1등을 해본 적이 없지만, 일본은 1등을 해본 적이 있는 나라입니다. 1989년 일본 기업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53%나 됐고요. 1990년엔 세계의 반도체 기업 톱 10 가운데 6개를 일본이 차지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물론 일본 스스로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도 있지만, 1985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미국이 일본의 수출경쟁력을 꺾은 것, 공교롭게도 1980년대 후반에 한국 삼성전자, 대만 TSMC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다는 것도 큰 변수였다고 생각됩니다. 즉 한국·대만이 반도체 사업을 잘해서였기도 했겠지만, 결국 1980년대 들어 (미국에 대해) ‘노(No)‘라고 외치기 시작한 일본을 견제하려고 미국이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를 키워준 측면, 아무리 작게 평가하더라도 한국·대만의 반도체 성장을 용인한 측면이 있다고 봐야하겠지요. 우리가 과거 일본의 꼴을 절대 겪지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우리들의 자만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과 대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향후 한국 기업이 반도체 전략을 짜는데 큰 변수가 될 수 있어 보입니다. 미국이 차이잉원 정권 2기에 대만에 확실한 선물을 안겨 완전히 미국편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트럼프 정권에 이어 바이든 정권에서 더 노골화되고 있으니까요.

반면에 삼성전자의 문제는 첨단패키징 기술을 발전시켜나가는데 도움을 줄 우군이 잘 안보인다는 것입니다. 일본과 미국을 품은 대만과 달리, ‘나홀로 기술력'으로 난관을 뚫어야 하는 상황이지요. 특히 첨단 패키징 분야의 최고 기술기반을 가진 일본을 삼성 파운드리가 흡수하지 못하는 것이 뼈아픈 일입니다. 일본과 미국의 연구개발 생태계까지 접수해 파운드리 차세대 기술에서도 삼성과의 격차를 벌리려는 TSMC, 국가적으로 이런 점이 여의치 않아 삼성 내부의 모든 역량을 결집해 파운드리의 미래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삼성의 격돌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는데요. 삼성이 이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선 자사 역량을 총집결하는 것은 물론, 어떻게든 일본·미국·유럽의 관련 연구개발 생태계와 연계해 ‘오픈 이노베이션'에 성공하느냐가 매우 중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YONHAP PHOTO-3982> "대미관계 굳건" 밝히는 차이잉원 대만 총통 (타이베이 AP=연합뉴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9일 타이베이에서 설날에 즈음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차이잉원 총통은 미국의 정권 교체에도 미국과의 관계는 굳건하다고 밝혔다. jsmoon@yna.co.kr/2021-02-10 14:39:40/ <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3. ‘시스템반도체를 지원한다'는 국가 전략이 될 수 없다... 대만처럼 선택·집중의 효과적 그랜드스트래티지 세우고, 그에 맞게 육성전략 짜야

최근에 반도체 산·학 대표들이 모여 한국 시스템반도체의 위기를 논하면서, 정부의 세제지원이 경쟁국에 비해 너무 적고, 반면에 환경규제 등은 너무 가혹하다며 개선을 촉구했습니다. 정부도 뒤늦게 특별법 제정 등을 얘기하며 대책을 수립하겠다고 나서고 있지요. 그런데 정부의 지원만 부족한게 아니라, 국가적인 시스템반도체 육성전략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형 시스템반도체를 개발한다’는 논의가 많은데요. 글쎄요. 이게 뭘까요? 한국형 시스템반도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렇게 만들면 누가 써준다는 것일까요? 이건 전략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제는 삼성이 좋은 시스템반도체를 개발해도 그걸 대량으로 사줄 외부의 고객이 마땅치 않습니다. 글로벌 대형 고객들이 스스로 설계하는 쪽으로 기술 흐름이 바뀌고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K반도체’를 정부 지원으로 만든들 그걸 누가 사줄까요? 수요가 없으니 후속 개발이 어렵고요. 성능이 최고인 것도 아닐 수 있고요. 세금만 낭비하고, ‘한번 해봤다’에서 끝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만들어진 반도체를 정작 국내기업도 써주질 않는 바람에, 프로젝트 자체가 표류하고 있는 사례도 있지요.

‘시스템반도체 개발을 지원한다’는 것은 절대 전략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 이긴다’라는 세부 플랜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한국은 국가적 반도체 지원책이 불충분할 뿐 아니라, 기술의 흐름을 읽고 집중하는 국가 대전략이 없다는 얘기가 오래 전부터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만약 한국의 IT업체가 소프트웨어 플랫폼으로 세계를 장악해 그 수요에 최적화한 AI반도체를 만든다고 하면 그건 가능합니다. 수요가 견인하는거니까 어떻게든 진척이 될겁니다. 하지만 그런 수요가 없다면, 한국이 퀄컴 같은 기존의 팹리스 모델로 크게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걸 써줄 곳이 많아야 팹리스로 성장할텐데 그게 안되니까요.

한국 정부가 조단위 거액을 투입해 차세대 AI반도체 개발을 지원한다고 예를 들어보죠. 그러면 이게 각각의 작은 팹리스 지원이나 수요처가 불확실한 AI반도체 개발에 나눠먹기 식으로 잘개 쪼개서 투입되는 겁니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뭔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결국에는 세금 낭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국가적 부를 축적할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역량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대만의 전략은 명확합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작년 5월 2기 정부의 총통 취임 연설에서 “대만은 세계경제의 격렬한 변동과 공급망 재편의 국면을 마주하고 있다”면서 “반도체와 IT산업의 강점을 살려 세계 공급망에서의 핵심적 지위를 전력을 다해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취임 연설의 주요 안건이 반도체였던 거죠. 이날 연설에서 자세한 내용이 언급되진 않았지만, 대만 기술관료들은 앞서 말씀 드린 미국이 주도하는 이종집적 반도체 기술 발전의 큰 변혁과 이에 따른 첨단패키징의 중요성 등을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바탕에서 대만 최고지도자가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디커플링(미국과 중국으로 쪼개지는 것) 현상을 간파하고, 미국과 밀착해 실리를 얻겠다는 메시지를 자국민에게 전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대만의 반도체 전략은 대만이 앞으로 더 큰 시장을 잡을 가능성이 있는 분야의 맥을 잡고, 모든 방향과 타임플랜을 거기에 맞춰 집중지원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사례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대만 과학기술부 소속 국가실험연구원과 국립성공(國立成功)대학은 작년 12월 ‘반도체 연구센터 타이난 기지’를 설립했는데요. 3나노 반도체가 생산될 TSMC 공장과 가까운 곳에 대만의 대학·연구 인력을 집결한다는 계획입니다. 그런데 이 연구센터의 핵심과제 중 하나가 바로 ‘헤테로지니어스 인티그레이션(Heterogeneous Integration·이종집적)의 패키징’입니다. 일단 기술의 전문성, 업계 당면 과제와의 강력한 연관성이 돋보입니다.

어떻습니까? 대만은 이미 정부가 알아서 자국기업이 정말 승부를 걸어 성공할 분야의 인재를 육성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해당 기업의 최첨단 공장 바로 옆에다 대규모 연구시설을 세워서 말입니다. TSMC는 앞으로 점점 중요해질 이종집적 첨단패키징 분야에서 정부의 총력 지원 아래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대만 국내 기술인력을 지원받을 테고요. 이것도 모자라기 때문에, 첨단패키징 분야 소재·장비·연구 인력이 가장 풍부한 일본까지 끌어안은거죠.

한국은 어떨까요? 정부의 시스템반도체 전략이 과연 최신 기술 흐름을 꿴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요? 파운드리에서 더 큰 미래가 열릴 것이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시스템반도체 시장 확대로 연결될 수 있다면, 한국 정부는 반도체 지정학적 구도 아래에서 자국 기업이 일본·미국의 관련 연구개발 생태계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데 과연 얼마나 도움을 주고 있을까요?

*뉴스레터 ‘최원석의 디코드’를 구독하시면, 목요일 아침마다 모빌리티·테크·비즈니스 관련 새로운 콘텐츠를 보내드립니다. 구독자 전용 글을 받아보시거나 추후 마련될 이벤트에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최원석의 디코드 구독하기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8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