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뜻밖에도 법정이었다. 지난 3월 21일~28일 미국 배우 기네스 펠트로가 미국 유타주(州) 파크시티 법원에 출석할 때 걸친 옷이 발단이었다. 펠트로는 지난 2016년 스키 리조트에서 한 남성과 스키 사고를 냈다. 이때 서로가 먼저 부딪혔다고 주장하면서 각각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 7년 넘게 이어진 소송 때문에 법정에 출석한 펠트로는 조신하면서도 세련된 모습이었다.

우리나라 드라마 ‘셀러브리티’에서 5선 국회의원 딸을 연기한 배우 이청아. 단정한 ‘올드 머니 룩’을 보여줬다(왼쪽). 지난 3월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 법원에 출석한 영화배우 귀네스 팰트로. 단정하지만 세련된 옷차림으로 화제를 모았다(가운데). 팝 가수 라이어널 리치의 딸 소피아 리치(오른쪽). Z세대에게 ‘올드 머니 룩’ 열풍을 불러온 주인공이다. /넷플릭스·AP연합뉴스·조선일보 DB

그가 첫날 걸친 ‘더 로우’의 모스 그린 울 코트, 둘째날 입었던 구프 G 레이블(Goop G Lable)의 크림색 니트 카디건과 체인 목걸이는 온라인에서 검색이 폭증했다. 소셜미디어엔 펠트로를 두고 “은밀한 부(stealth wealth)’,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의 아이콘처럼 보인다”, 혹은 “올드 머니의 느낌이 난다(old money feel)”는 평이 잇따랐다.

‘올드 머니’란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을 뜻하는 말이다. 부(富)를 대를 이어 물려 받는 일부 상류층의 옷차림을 두고 ‘올드 머니 룩’이라고도 부른다.

조용한 럭셔리, 이른바 올드 머니 룩이 최근 Z세대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요란하게 로고를 내세우거나 누가 봐도 어느 브랜드인지 알 수 있도록 꾸미는 것이 아니라, 고급 소재의 옷을 간결하게 입는 클래식한 스타일이다. 보통은 중년 이상이 선호하는 옷차림이지만 최근엔 Z세대가 이에 열광하고 있다는 것이다.

◇Z세대, ‘올드 머니 룩’에 빠지다올드머니/소피아리치

10대~20대가 가장 많이 애용하는 소셜미디어로 알려진 틱톡. 이곳에서 ‘올드 머니’ 관련 해시태그 게시물 조회수는 25억뷰가 넘는다. ‘은밀한 부’ 해시태그와 관련된 게시물 조회수도 600만뷰를 넘었다.

화려한 로고는 빼고, 캐시미어 니트나 실크처럼 고급 소재를 주로 입고, 심플한 재킷에 진주목걸이나 작은 다이아몬드 귀걸이 정도로만 포인트를 주는 스타일이 ‘올드 머니 룩’에 가깝다.

Z세대가 엄마나 할머니가 좋아할 법한 스타일에 새삼 열광하는 데는 젊은 인플루언서가 역시 큰 영향을 끼쳤다. 유명 팝 가수 라이오넬 리치의 딸이자 모델인 소피아 리치가 대표적이다.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1억69만명인 그는 자신의 계정에 ‘OOTD(Outfit of The Day·그날 입은 옷)’ 사진을 올린다. 진하지 않은 색조화장에 그리 꾸미지 않은 듯 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로 인기를 끌고 있다.

AI에게 “올드 머니 룩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그려낸 모습을 담아냈다는 버추얼 모델 ‘펠리(@feli.airt)’의 모습도 최근 Z세대가 열광하는 ‘올드 머니’ 스타일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펠리(@feli.airt)’의 인스타그램 계정엔 이미 팔로어가 29만명이 넘는다. 이 계정에서 AI 모델은 금발 머리에 도톰한 입술을 하고 아이비리그 대학생처럼 보이는 수트나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다. 승마나 요트 세일링을 즐기기도 한다. 전형적인 미국 주류 지배계급인 와스프(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이미지에 브룩 쉴즈나 데니스 리처드처럼 가장 대중적인 욕망을 반영하는 영화배우의 얼굴을 합성한 AI 이미지라는 비판을 받을 법도 하지만, 팔로어는 매일 가파르게 늘고 있다.

◇불안한 삶에서 찾는 ‘가짜 위안’

일부에선 전세계적으로 치솟는 물가, 자신의 노력으로는 더는 부모 세대의 부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젊은 세대의 ‘쇼크’가 이같은 유행을 낳은 것이라고도 분석한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부의 양극화를 경험한 Z세대가 자신의 동경을 반영해 올드 머니 룩에 열광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 유행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안정감’에 가까운 위안을 얻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