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은 같은데 ‘브랜드’에 따라 가격이 20% 뚝 떨어진다. 원재료 값은 비싸지는데 판매 가격을 쉽게 올리지도 못한다. 남양유업·매일유업 등 우유 제조 업체가 만들어 편의점이나 대형 마트에 납품하는 PB(유통 업체 자체 브랜드) 흰 우유 얘기다.

올해 원유(原乳) 값이 8.8% 치솟으면서 ‘밀크플레이션’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저가 상품인 PB 우유에 주목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원래도 저렴했으나 지난 1일 일반 흰 우유 주요 제품(900mL~1L)이 최대 3200원으로 오른 사이에도 2600원 안팎으로 동결되면서 관심이 더 커졌다. 일부 편의점에선 일반 우유 가격 인상 후 PB 우유 매출이 40%씩 늘었다.

PB 흰 우유는 우유 제조사들이 만드는 자체 제품(일반 흰 우유)과 원재료, 생산 공정, 영양 성분이 같은, 사실상 동일 제품이다. 실제 남양유업 ‘맛있는우유 GT(900mL)’ 제품은 천안·경주·나주에서 생산하고, 100mL당 열량은 60kcal인데, 남양유업이 편의점 GS25에 납품하는 ‘1974(900mL)’ 제품도 같은 데서 생산하고 열량도 같다. 영양 성분도 마찬가지다. 매일유업, 부산우유농협이 만드는 자사 제품과 CU, 홈플러스에 납품하는 우유도 그렇다.

우유팩 디자인만 다를 뿐 내용물은 같은데 왜 가격에 차이가 생기고 제조사 마음대로 값을 올리는 것도 어려운 걸까. 우유 제조 업계에선 “선진국에서 보기 어려운 ‘원유 쿼터제’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업체별 필요량 이상의 원유를 매년 사들여야 하다 보니, ‘남아도는 정상적인 원유’를 활용하려고 PB 우유를 활성화하게 되고, 제품 판매는 유통 업체에 의지하다 보니 제조사가 가격을 정하는 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독특한 시장 구조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픽=백형선

◇원재료·생산 공정 같은데 가격 차이 왜 나나

우유 제조사들은 2002년 ‘낙농가 보호’를 이유로 국내에 원유 쿼터제가 도입된 이후 매년 낙농가에서 일정량의 원유를 사들이고 있다. 문제는 당시 정해진 원유 매입량이 거의 변하지 않은 반면, 20년 사이 흰 우유 소비량은 줄어들었다는 데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1인당 연간 흰 우유 소비량은 2002년 28.6kg에서 지난해 26.2kg으로 감소했다. 저출산에 따른 학교 우유 급식 감소, 우유 외 유제품 선호 현상 등이 영향으로 꼽힌다. 이런데도 주요 유업체들은 올해도 필요량보다 10%가량 많이 원유를 사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원유가 남으면 제조사들은 가공유나 발효 식품, 탈지분유, PB 우유로 만들어 처리한다. 가공유·발효 식품은 소량만 생산하고, 탈지분유는 1년간 장기 보관은 가능하지만 보관료 등을 따지면 손해라고 한다. 게다가 분유도 저출산 영향으로 잘 팔리지 않는다. 지난 8월 기준 4379t이 재고로 남아 있다. 그나마 PB 우유는 제조사들이 1% 내외의 마진율을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백형선

◇유통 업체 “우리, 제조사, 소비자 모두 이득”

남는 원유로 만든 PB 상품을 납품한다는 사실을 유통 업체도 알고 있기 때문에 가격 협상력이 떨어지고 때로 손해도 본다는 게 우유 제조사들 얘기다. 유통 업체가 초저가 마케팅을 위해 가격을 동결하더라도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통 업체는 “PB 우유 덕에 우리와 제조사, 소비자가 모두 이득을 본다”고 얘기한다. 자신들은 저가 상품군으로 매출이 늘고, 제조사는 남는 원유를 처리할 수 있고, 소비자는 제품을 싸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유통 업체 관계자는 “제조사에서 직접 납품받기 때문에 물류비가 적고, 마케팅 비용도 거의 들지 않아 PB 가격을 저렴하게 책정할 수 있다”며 “유통 업체도 마진을 절반 정도 적게 보고 판매하는 것”이라고 했다.

제조사의 가격 인상 요구를 유통 업체가 받아들이기도 한다. GS25 등 일부 편의점은 오는 12월 PB 흰 우유 가격을 인상할지 검토 중이다. 인상폭은 일반 우유와 비슷한 5% 안팎, 100~150원 선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PB 우유 가격이 오르면 같은 비율로 제조사가 유통 업체에서 받는 금액도 인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