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규 기자

죽을 때는 장례식 비용만 남겨놓으면 된다고? 인생 종점까지 재산을 쌓아두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즐겁게 살면서 다 쓰고 죽겠다고? 이런 생각은 이제 과거의 규칙이 되어가는 듯하다. 유례없는 자산 가격 급등이 우리 사회의 변화를 앞당기고 있다.

한때 ‘재산은 자녀의 영혼을 망친다’면서 ‘쓰죽(쓰고 죽자)’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자녀에게 재산을 남기겠다고 욕심내지 말고 죽기 전에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자고 하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 개인 재무컨설턴트인 스테판 폴란이 이런 내용을 담아 ‘다 쓰고 죽어라(Die Broke)’라는 책까지 썼고 베스트셀러가 됐다.

스테판 폴란은 “오래 전부터 재산 상속은 실제로 개인의 직업 윤리를 좀먹는 원인이 되어 왔다”면서 “15만 달러 이상 유산을 받은 사람 중 20%가 실업자였고, 상속을 받을 것이란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소비를 많이 하고 저축을 적게 한다”고 분석했다. 부모가 남겨줄 수 있는 재산이 많으면, 자녀들이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하려는 심리가 커진다는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박상훈 기자

하지만 코로나 이후 자산 가치가 치솟으면서, ‘쓰죽’ 운동에 크게 공감했던 사람들조차 생각을 바꾸고 있다. 중위소득 계층이 월급을 다 모아도 중간가격대 아파트를 사려면 18년이 넘게 걸릴 정도로 젊은층이 부(富)를 쌓기가 어려워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타난 현상이 바로 ‘반쓰죽(반만 쓰고 죽자)’이다.

지난 달 본지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인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의뢰해 30~60대 남녀 120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도 이런 반쓰죽 트렌드가 나타났다.

‘재산이 있다면 상속 계획은 어떻게 세우겠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4%가 절반은 쓰고 절반은 물려주겠다고 답했다. 전부다 쓰고 죽겠다는 ‘쓰죽’ 응답자는 전체의 20.7%에 불과했고, 전부 물려주겠다는 응답은 25.4%였다. 특히 50~60세대는 응답자의 57~61%가 ‘반쓰죽’을 하겠다고 답해, 30~40대의 응답 비율인 42~52%를 웃돌았다.

서울에 사는 60대 은퇴 생활자 A씨는 “집값이 이렇게 비싸고 자녀 교육비도 많이 들어가는 상황에서 아무리 대기업 회사원이라도 월급만 갖고선 내집 마련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면서 “연금은 내가 살면서 다 쓰겠지만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나머지 자산은 (자녀에게) 남겨주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A씨는 자녀의 일할 의욕와 생존 본능을 꺾고 싶진 않아서 평소에는 “남겨줄 것은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고 한다.

/사진 출처: 페이스북

지난해 코로나 이후 사전 증여가 급증한 것도 반쓰죽 트렌드와 연관이 있다. 15일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증여 재산가액은 43조6134억원으로, 1년 전에 비해 54.4% 증가했다.

거액 자산가들을 상대하는 대형 증권사 소속 L씨는 “큰손들은 한 번 종잣돈이 만들어지면 그게 눈덩이처럼 다시 불어나는 복리 효과를 직접 체험했던 경우가 많다”면서 “한꺼번에 거액을 주진 않더라도 종잣돈 정도는 미리 주겠다는 비율이 전체 고객의 90%는 된다”고 말했다. 50대 주부 황모씨는 “아주 많은 돈을 물려주는 것은 자녀에게 독(毒)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사회에서 기반을 잡으려고 할 때 약간의 부모 도움은 큰 힘이 될 것 같다”면서 “(내가) 주변 도움 하나 없이 시작해서 너무 힘들었기에 조금은 보태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은퇴 전문가들은 자산 이전이야말로 노후 자산 관리의 중요한 축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경록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대표는 “상속(증여)은 본인의 후생, 자녀의 후생, 가족의 화목이 달려 있는 종합예술”이라며 “지금 아껴서 자녀에게 상속재산으로 남길 것인지, 아니면 지금 충분히 쓰고 상속 재산은 남기지 않을 것인지, 유산은 증여로 미리 줄 것인지, 아니면 사망시 상속재산으로 줄 것인지 등 자산 이전은 자녀의 재산 형성뿐 아니라 노후 자산 관리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단군 이래 최고의 자산 가격 급등기에 부모에게 의존하려는 자녀를 외면하긴 어렵다. 과거의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기성세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달라진 현실이다. 다 쓰고 하나도 남겨주지 않았다간 편히 눈감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100살까지 살지도 모를 초고령화 시대에게 자녀에게 한꺼번에 일찍 다 물려주면 본인 노후의 삶이 겉잡을 수 없이 무거워질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자산이 많고 연금 등으로 매달 현금 흐름이 상당한 경우엔, 절세 차원에서 부지런히 사전 증여를 고민해 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