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알람 없는 평일 아침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출근 시간이 사라지는 날이 언젠가는 닥친다. 치열한 사회 생활의 일단락을 의미하는 은퇴 얘기다.
그런데 은퇴는 충분한 노후 자금을 준비해 놓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은퇴 이후 40년 이상 더 살아야 하는 100세 시대에는 부부, 자녀 등 가족 간의 평화로운 공존과 갈등 관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령화 사회인 일본에서 유행하는 이른바 ‘정년(停年) 소설’ 내용을 토대로 예비 은퇴자들이 빠지기 쉬운 3가지 착각을 뽑아봤다.
①“너희들이 내 재산이고 보험이지”
생업에서 물러나면 그때부터 자녀들에게 부양받다가 생을 마무리하겠다는 생각, 혹시라도 하고 있었다면 버려야 한다. 은퇴 전문가들은 ‘자녀=노후 대책’이라는 공식은 이미 깨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강창희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포럼 대표는 “자녀가 노후 대책이라고 생각하지만 부모가 100세 될 때까지 모실 자식도 드물고, 자식 세대도 자기 사는 문제로 허덕거리고 있다”면서 “자녀에게 있는 돈 없는 돈 다 퍼줬으니 당연히 봉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자녀들은 부모의 지원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녀들도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고 싶지만 그럴 만한 경제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치솟은 집값, 높은 세금, 조기 퇴직 등으로 예전보다 생활 형편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은퇴한 부모님을 부양하고 있는 40~50대는 감당하기 힘들다고, 먹고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서울에 사는 주부 황모씨는 “남편이 50을 넘어 곧 현역에서 은퇴할 나이인데 시댁에서 세금 걷듯 매달 생활비를 받아가서 힘들다”면서 “20년 키워주고 30~40년 자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올바른 효도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주부 이모씨는 “애들 학원비로 돈이 많이 들어 힘들 테니 이번 설날엔 챙기지 말라고 부모님이 먼저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면서 “장남을 화수분으로 아시는 건지, 나중에 우리 노후는 도대체 누가 보살펴 줄 것인지 걱정된다”고 한숨 쉬었다. 그러면서 이씨는 “만약 내 자녀의 예비 배우자가 부모 부양을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결혼을 결사반대할 것”이라고 했다.
50대 회사원 최모씨는 “우리 부모 세대는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지 몰랐고 자녀 부양이 당연한 시대였으니 노후 준비가 안 되어 있을 순 있지만, 우리 세대는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면서 “자식 세대는 우리보다 살기가 빡빡할 것을 뻔히 아는데, 짐이 되진 않겠다”고 말했다.
김동엽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장은 “자녀가 괜찮은 일자리를 갖기 어렵고 부모보다 풍족하게 살 가능성도 낮은데 죽을 때까지 부양 받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면서 “내가 90살까지 산다고 가정할 때 자녀도 이미 60살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②“집사람이 같이 놀아주겠지”
과거엔 은퇴 후 부부가 함께 사는 시간은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100세 시대에는 노부부가 함께 살아야 하는 시간이 최소 30년이다.
아침 일찍 회사에 나갔다가 자정에 귀가하고 주말도 없이 일했던 남편에겐 로망이 있다. 아내와 하루 3끼 식사를 같이 하고 주말엔 영화도 보러 나가고 마치 결혼 전 연애 시절처럼 살아 보길 원한다. 거주지도 전원 생활이 가능한 서울 근교로 옮기고 주말 농부로 살아보고 싶다. 당연히 아내도 본인과 같은 노후 생활을 꿈꾸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내의 속마음은 다르다. “하루 온종일 같이 지내라고요? 애들 다 키웠는데 다 늙어서 남편까지 돌봐야 하나요. 밥도 점심, 저녁까지 신경 써서 차려줘야 하고, 놀아줘야 하고, 은퇴해서 위축된 남편 기분도 달래줘야 하고, 정말 너무 불편하고 부담스러워요.” “혼자서 할 줄 아는 것은 하나도 없고, 왜 하루 종일 저(아내)만 찾는지 모르겠어요. 특별한 용건도 없는데 괜히 찾고, 정말 답답해요.”
은퇴 노부부의 동상이몽(同牀異夢)은 일본의 베스트셀러인 ‘끝난 사람(終わった人)’에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도쿄대 법대를 졸업하고 대형 은행 임원 자리까지 올랐지만 출세 코스에서 밀려나 정년 퇴직을 맞이한 63세 남자 주인공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같이 온천에 갈래? 세계문화유산을 함께 보러 가면 좋겠고 벚꽃 시즌이니까 드라이브도 하면 좋겠고...”
하지만 아내의 대답은 뜻밖이다. “1박 정도면 따라가 주겠지만 바빠서 그 이상은 안돼, 친구하고 같이 가.” 남자 주인공은 “아내의 답변을 들으면서 여생을 아내와 함께 즐기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꿈이었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며 비참해 한다.
은퇴는 삶의 터전이 회사에서 집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일 중심으로 살아온 직장인이었어도 은퇴하면 관계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김동엽 센터장은 “회사일만 해 왔던 남편은 아무래도 집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킹에 약할 수밖에 없다”면서 “아내는 그 동안 지역에서 나름의 네트워킹을 만들어 활동을 해 왔는데 남편 때문에 개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집순이가 되어야 하면, 스트레스가 커지고 결국 부부 갈등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은퇴한 남성에게 필요한 것 다섯 가지는 아내·와이프·처·마누라·집사람이라고 하지만, 은퇴 가정 아내의 우선 순위에는 남편이 없다. 일본의 노후 전문가 오가와 유리(小川有里) 씨는 “일본에서 은퇴 후에 가장 사랑받는 남편은 노후 준비 잘해둔 남편, 요리 잘하는 남편, 아내 말 잘듣는 남편이 아닌, 집에 없는 남편”이라고 말했다.
③“일찍 죽으면 어떡하지”
길어진 노후에 대비해 연금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면, “일찍 죽으면 손해인데 왜 가입해야 하나요?”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야말로 크나큰 착각이다. 현재 한국 남녀의 최빈 사망 연령은 평균 88세다.
강창희 대표는 “지금 세대의 노후 준비는 부모님 세대와는 완전히 다르다”면서 “운이 나쁘면 120세까지 산다라는 말이 있듯이 대책 없는 장수는 축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동엽 센터장도 “일찍 죽을까봐 걱정할 게 아니라, 오래 살 것을 걱정해야 한다”면서 “노후에는 의료비, 생활비 등 고정 지출이 많기 때문에 현금 흐름이 반드시 필요하고, 연금을 통해 노후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