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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노후 자금 924조원을 굴리는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시장의 큰손이다. 조만간 1000조원을 돌파하고, 2041년대엔 1778조원까지 불어나게 된다. 1778조원까지 늘어나는 즈음에 한국 국민연금은 세계 최대 연기금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한국 국민연금은 선진국에 비하면 출발이 늦었지만 빠른 속도로 덩치를 불려나가고 있다. 선진국 연기금은 상대적으로 나가는 돈이 많다 보니 한국처럼 덩치가 비약적으로 커지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아직 들어오는 돈이 더 많다 보니 팽창에 가속도가 붙는다.

세계 최대 연기금이라는 이웃나라 일본의 공적연금(GPIF)을 예로 들어보자. GPIF의 운용 규모는 작년 말 기준 199조2518억엔(약 2079조원)이었다. 그런데 10년 전인 2012년 GPIF의 운용 규모는 108조1297억엔이었다. 10년 간 84% 증가했다.

한국 국민연금은 어떨까. 2021년 11월 말 기준 적립금은 924조원인데, 10년 전인 2011년 말엔 349조원 수준이었다. 10년 동안 165% 커졌다.

압축 성장하는 만큼, 고민도 크다. 작년 말 기준 대한민국 증시의 시가총액은 전 세계 증시의 1.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미국이 60%로 최대). 너무 많은 돈을 굴려야 하는 탓에 마땅한 투자처를 찾기 어렵다.

비좁은 국내 증시에서 투자하다 보니, 연기금은 웬만한 한국의 대형 기업은 무조건 담고 간다. 국내 대형주의 주요 주주 명단에 항상 국민연금이 올라와 있는 이유다.

국민연금은 삼성전자 지분 8.69%를 보유한 2대 주주이고, SK하이닉스 역시 9.19%를 보유해 2대 주주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국민연금이 5% 이상 투자한 상장사는 265곳에 달했다. 국민연금이 지분 10% 이상을 보유한 상장사도 45곳이나 된다.

3월 대선을 앞둔 요즘, 국민연금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대선 후보들이 모두 국민연금 개혁에 공감하고 있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가 생길 전망이다. 사진은 3일 열린 여야 4당 대통령 후보들의 첫 TV토론 현장./뉴스1

그런데 국민연금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국내 증시 버팀목을 할 지는 의문이다. 국민연금 자산 배분 계획안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오는 2026년까지 국내 주식 비중을 14.5% 수준에서 유지할 예정이다.

작년 11월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보유 비중은 16.9%(156조6000억원)이니까, 국내 주식 비중을 서서히 줄여나가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빈 자리는 해외주식, 대체투자, 해외채권 등으로 채워 나간다. 지난해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국내 주식을 24조원 어치 팔아치운 것도 이 같은 중기 자산 배분 계획에 따른 것이다. 수익률만 비교해 봐도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작년 11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해외주식 투자 수익률은 28%에 달해 가장 높았고, 국내주식은 1.43%에 그쳤다.

국민연금이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는 이유는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적립금이 축적되고 있는 지금, 수익을 많이 챙겨 놔야만 고갈 시점을 늦출 수 있다. 결혼한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기 전에 최대한 재테크를 많이 해 놔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국민연금이 연금 지급을 위해 적극적으로 주식을 사는 대신, 오히려 장기 보유했던 자산을 팔아야 할 때는 언제가 반드시 온다. 아무리 저평가된 주식이 시장에 널려 있어도 국민연금이 살 돈이 없어서 사지 못하는 타이밍이 온다는 얘기다.

국민연금이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서는 시점은 대략 2040년이다. X세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생들이 차례로 65세가 되면서 국민연금을 받아가기 시작하는 시기다.

국민연금 매수세가 약해지면 한국 증시에서 어떤 일이 생길까. 사실 그 누구도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다. 전세계에서 유례 없이 연금 규모가 빠른 속도로 커진 데다 저출산·고령화 속도는 전세계 1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식시장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뚜렷한 매수 주체가 없는 신규 상장주의 사례를 살펴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힌트는 얻을 수 있다.

다음은 지난해 상장한 4개 대형 신규 상장주(SKIET, 카카오뱅크, 카카오페이, 크래프톤)의 주가 추이와 연기금의 누적 순매수 추이다(NH투자증권 자료). 그래프를 보면 알 수 있듯, 연기금의 대표 주자인 국민연금이 해당 종목 비중을 다 채워서 주요 주주라고 공시에 등장하고 난 후, 주가는 신기하게도 횡보하거나 급락했다.

연기금은 코스피200 지수에 편입되는 대형 종목들을 포트폴리오에 담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해당 종목의 주가는 오르게 된다. 하지만 연기금이 매수를 멈추고 나면, 해당 기업 주가의 상승세는 멈춘다. 이른바 ‘연기금 효과’다.

홍춘욱 EAR리서치 대표는 “대표 지수에 편입되는 대형 종목이 나오면 연기금은 (앞으로 성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이) 해당 종목을 기계적으로 살 수 밖에 없다”면서 “만약 매수하지 않았다가 지수 대비 성과가 차이 나면 담당자가 문책을 당하는 등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근 한국 증시에서 나타나는 연기금 효과는 시가총액이 커서 지수에 편입되는 신규 상장주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패시브 투자자인 연기금은 지수를 추종하기 때문에 신규 상장주나 바이오 비우량 기업이라도 시총이 커져서 특정 지수에 편입되면 사야 하는 게 운명”이라며 “국내 증시의 상장 열풍 속에 대형 기업공개(IPO)가 이어지고 국민연금이 어쩔 수 없이 매수하고 있는데, 국내 증시에 후유증을 남기는 대형 IPO에 대해서는 금융당국이 속도 조절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