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자들이 갖고 있는 ‘죽은 돈’부터 살려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모험을 피하고, 투자나 소비도 망설이게 됩니다. 밖에 나가 쓰고 싶어도 힘이 없어서 쓰지 못하니 돈이 잠겨버립니다. 젊은이들에게 돈이 흘러가야 투자와 소비를 해서 경제가 돌아가지 않겠어요?”(금융 원로 A씨)
앞으로 2년 후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000만명을 돌파하는 가운데, 세대 간 부(富)의 이전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요즘 같은 가파른 고물가 시대에 노후가 불안해진 고령층이 지갑을 닫으면, 인구 구조 변화와 맞물리면서 우리 경제의 ‘아킬레스 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창희 트러스톤연금포럼 대표는 “어느 사회든 경제가 활성화되려면 젊은 사람에게 돈이 흘러가야지, 노인층에 고여 있으면 경제는 활기를 잃고 쇠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1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우리나라 60세 이상 도시 가구주의 평균 소비성향은 64.7%였다. 소비성향이란, 처분가능소득에서 소비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말한다. 평균 소비성향이 64.7%라는 의미는 100만원을 벌면 64만7000원을 쓴다는 얘기다. 지난 2003년만 해도 81%에 달했고 2019년 1분기만 해도 75% 수준은 유지했는데 허리띠를 졸라 매면서 소비성향은 연일 낮아지고 있다.
지난 1일 한국은행도 인구 고령화에 따라 소비가 둔화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인구 고령화에 따른 경제주체들의 생애주기 소비변화 분석)를 냈다. 정동재 한국은행 과장은 “지난 1995년부터 2016년까지 20년간 인구 고령화는 가계 소비를 약 18% 하락시켰다”면서 “오는 2020~2035년의 고령화 추이 또한 연평균 약 0.7% 정도로 소비를 감소시킬 것”이라고 추정했다.
한국 경제가 고성장하던 시기에 자산을 축적한 고령자들 중엔 장수 위험과 세금 등이 부담스러워 지갑을 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언제까지 살 지 알 수 없는데 물가와 세금은 자꾸 오르고 있으니 소비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노쇠화가 진행되면서 소비 욕구도 점점 줄어든다.
은퇴 생활자인 70대 이모씨는 “다리 힘이 좋지 않으니 여행을 가기도 힘들고, (밥을 하루 다섯끼씩 먹는 것도 아니고) 비싼 식당에 가는 것도 이젠 즐겁지 않다”면서 “작년엔 손녀딸이 태어나서 100만원짜리 유모차 사준 게 가장 큰 소비였다”고 말했다.
노인 대국인 일본은 고령화 문제에 관한 살아 있는 교과서 같은 곳이다. 우리보다 앞서 저출산 대책을 내놓았고, 노년층이 남긴 재산을 물려받는 자녀의 연령도 고령화하는 이른바 ‘노노(老老) 상속’에 대한 대책도 내놨다. 은퇴 세대의 돈이 경제 활동이 왕성한 세대로 넘어가서 경제에 활력이 생겨나게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2년 주택자금 증여 비과세, 2013년 교육비 증여 비과세에 이어 2015년부터는 육아·출산비 증여 시 세금을 면제해 주는 정책을 시행했다. 세제 측면에서 화끈하게 지원해줘서 고령층에 편중된 자산을 젊은 층으로 이전시키고 소비와 투자를 늘리겠다는 전략이다. 일본 정부는 이 같은 생전증여 활성화 정책이 충분한 효과가 있다고 보고, 지금까지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장기선 신한금융투자 세무팀장은 “일본과 한국은 상속·증여세율이 50%가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명목세율만 그렇고 실효세율로 따져보면 크게 다르다”면서 “일본은 생전증여나 공제 등의 혜택이 많이 있어서 실제로는 한국만큼 부담이 크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처럼 세금 부담이 높으면서도 일본에 100년 장수 기업들이 즐비한 이유도, 가업 상속과 관련된 세제 혜택이 많아서라고 한다. 한 세무 전문가는 “한국에도 가업 승계와 관련해 절세 제도가 있긴 하지만 우동집을 하다가 라면집으로 바꾸면 다시 세금을 물어내야 하는 등 조건이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다”면서 “다른 나라에 비해 기준이 엄격하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선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경제 대국인 미국은 부(富)의 이전으로 나타나는 경제 효과에 대해 긍정적이다. 미국은 상속세와 증여세 면제액을 계속 높여왔는데, 작년엔 1170만달러(약 142억원)에 달했다. 부부 합산이면 2340만달러까지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워런버핏 같은 수퍼리치가 아니라면 세금이 거의 없는 셈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작년 7월 베이비부머와 고령층이 보유한 천문학적인 자산이 후손들에게 활발히 이전되고 있으며, 젊은 세대들이 이전된 부를 활용해 창업, 자선단체 지원, 주택 구입 등 경제적 활동을 촉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부의 이전이 진행 중(The biggest transfer of wealth in history is underway)이라는 것이 WSJ의 분석이다.
물론 한국에선 일본과 유사한 세대 간 자산 이전 촉진 정책은 사회적인 저항이 커서 도입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빈부 격차를 확대할 것이란 비난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014년 모 국회의원이 조부모가 교육비 용도로 재산을 물려주면 최대 1억원까지 증여세를 면제해주자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지만, 여론 뭇매를 맞고 바로 철회했다.
세대 간 부의 이전을 경제 활력이란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어떨까. 증여세 면세 기준을 현실화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증여세 면세 한도는 성년 자녀 기준 10년간 5000만원이다.
한 세무 전문가는 “증여세 면세 기준 3000만원이 처음 만들어진 게 1994년인데, 당시 잠실 아파트 한 채 가격이 280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면서 “자녀가 결혼할 때 부모가 여력이 된다면 사줄 수 있을 규모의 금액이라 보고 책정한 기준이었는데, 이후 2014년에 5000만원으로 높아졌지만 그 동안 집값이 크게 올랐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