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가 한국의 자산 이전 판도를 바꾸고 있다. 80~90대 노부모가 숨지면서 노인 줄에 접어든 자녀가 재산을 물려받는 이른바 ‘노노(老老)상속’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23일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 2020년 상속세를 낸 피상속인(사망자)의 나이가 80세 이상이었던 사례는 총 5773건으로, 전체 건수의 56.7%에 달했다. 역대 최고치다. 10년 전만 해도 이 비율은 40% 정도였는데, 우리 사회의 고령화 추이와 맞물리면서 상속자금도 늙어가고 있다. 국세청이 최종 결정한 2020년 상속 재산가액 기준으로 계산하면, 약 12조원의 재산이 노노상속에 해당한다.

피상속인 나이가 80세 이상이면 자녀는 50대, 90세 이상이면 60대 자녀로 추정된다. 그런데 인생 주기로 살펴 보면, 50~60대는 대부분 자녀 교육을 끝내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해 가는 시기다. 나이 들어 부모에게 물려받는 자산은 투자나 소비에 쓰이기 보다는 안전한 곳에 고이는 ‘자산 잠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피상속인인 부모와 상속인인 자녀가 모두 고령층에 속하는 이른바 '노노상속'이 한국에서 현실화하고 있다. 지난 2020년 기준 80대 이상 피상속인(사망자) 비중이 56.7%로, 60%에 육박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민경

부모 재산을 물려받는 자녀의 나이가 늦어질수록, 자산은 더욱 잠겨버린다. 은퇴 생활자인 70대 A씨는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나이가 들면 돈 쓸 곳이 줄어든다”면서 “먼저 세상을 뜬 친구도 있어서 예전처럼 골프 치러 나가지도 못하고 나도 건강이 좋지 않아지니 병원 말고는 돈을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60대 은퇴 생활자 B씨는 “나이가 들면서 소득이 줄어든 데다 세금과 건보료가 크게 올라서 사는 게 빠듯하다”면서 “노후 준비를 일찍 준비하지 못해 공포스러운데, 100살까지 살지도 모르니 정말 걱정된다”고 말했다.

한국은행도 이달 초 인구 고령화 때문에 가계 소비가 2035년까지 해마다 0.7%씩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동재 한은 통화정책국 과장은 “기대수명이 늘어나면 현재 소비를 줄이고 미래를 위해 저축을 늘리는 경향이 뚜렷해진다”면서 “고령화로 가계 소비는 지난 1995~2016년 누적 18% 줄었고 앞으로도 장기간 가계소비 감소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정식 가온법무법인 고문은 “자산 승계 문제에 관한 한, 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며 나라 경제에는 재앙일 수 있다”면서 “끝까지 재산을 꼭 쥐고 있는 구순 어르신이 70대 자녀가 먼저 사망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손주들에게 물려주는 상황도 발생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가계의 금융자산 추이도 앞으로 이렇게 변할 지 모른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지난 2014년 기준 일본 가계 전체의 금융자산은 1700조엔이었는데 그 중 60세 이상이 보유한 자산이 1007조엔에 달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민경

노노상속은 우리 사회의 미리보기 무료판인 일본에선 오래 전부터 중요한 사회 이슈다. 일본의 80세 이상 피상속인 비중은 지난 1989년만 해도 전체의 38.9%였지만, 지난 2016년에는 69.5%까지 높아졌다. 90세 이상으로만 봐도 24%가 넘는다.

일본은 고령층이 투자와 소비에 적극 나서야 한다면서 재무성(한국의 기획재정부) 주도로 일련의 대책을 내놨다. 정부가 기업들에게 내부에 현금을 쌓아두지 말고 설비 투자 등에 적극적으로 써서 경제 활성화에 힘써 달라고 설득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2년 주택자금 증여 비과세, 2013년 교육비 증여 비과세에 이어 2015년부터는 육아·출산비 증여 시 세금을 면제해 주는 정책을 시행했다. 은퇴 세대의 돈이 경제 활동이 왕성한 세대로 넘어가서 경제에 활력이 생겨나게 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일본 정부는 생전증여 활성화 정책이 효과가 있다고 보고 여전히 시행 중이다.

일본 재무성은 지난 2018년 펴낸 ‘자산과세(資産課税)’ 보고서에서 “피상속인의 나이가 80대 이상이라는 것은 자녀 나이가 50대 이상이라는 의미”라면서 “젊은 세대로의 자산 이전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인 만큼, 자산 이전 시기를 선택할 수 있도록 중립적인 제도 구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장기선 신한금융투자 세무팀장은 “한국의 증여세 면세 기준은 지난 2014년부터 8년째 5000만원인데 그 동안 우리 사회의 자산 가격이 급등한 것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런 기준을 현실에 맞춰 높인다면, 세대 간 부의 이전을 통한 경제 활성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상속 자금의 고령화 문제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변수는 인지증(치매)이다. 인지증은 일반적으로는 완치가 어렵고, 계속 진행되어 마지막을 비참하게 마치는 병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선 피상속인이 인지증 환자인 것도 문제지만, 상속인도 나이가 들어 인지증에 걸리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이른바 인인상속(認認, 치매를 의미하는 인지증을 가진 부모가 인지증이 생긴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인지증 환자는 80만명 정도인데 해마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일본(600만명)에 비해서는 아직 낮은 수준이지만, 2050년쯤엔 300만명에 육박할 전망이다.

배정식 가온법무법인 고문은 “수백억대 자산가인 100세 부모와 70대 미혼 자녀가 재산을 정리하기 전에 모두 치매에 걸리는 바람에 분쟁이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면서 “60대 이상 고객과 재산 관련 계약을 할 때는 당사자들이 모두 인지 능력에 문제가 없다는 내용의 의사소견서를 받아서 분쟁 소지를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