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이 가난해졌다(日本人は貧乏になった)”
요즘 일본 언론에는 ‘가난한 일본인’이라는 말이 부쩍 많이 나온다. 디즈니랜드 입장료, 다이소 가격 등이 전세계 최고로 싸다는 내용을 담은 ‘싸구려 일본(安いニッポン)’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을 정도다. 엔화 가치 하락으로 각종 수입 물가가 비싸져서 가계의 고통이 앞으로 더 커질 것이란 우려도 크다.
28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 주 6년래 최저치로 떨어진 엔화 가치는 28일에도 계속 떨어졌다. 지난 22일 120엔선을 뚫고 치솟은 엔·달러 환율은 이날 결국 123.87엔까지 찍었다. 엔·달러 환율이 123엔이라는 것은, 엔화 123엔과 1달러를 바꿀 수 있다는 얘기다.
1년 전만 해도 엔·달러 환율은 108~109엔 정도였는데 이달 들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엔화 가치 하락). 앨버트 에드워즈 소시에테제네랄(SG) 전략가는 지난 25일 블룸버그에 “외환 트레이더들이 이를 악물고 엔화를 팔아치우고 있다(traders get the bit between their teeth)”면서 “엔·달러 환율이 1990년 이후 최고인 150엔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말했다.
원·엔 환율도 이날 1000원이 깨지면서 996.55원까지 내렸다. 지난 2018년 12월 14일(995.9원) 이후 3년 3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전쟁과 인플레이션 속에 가속도가 붙은 엔저는 일본인들의 불안감을 더 키우고 있다. 미국 등 주요국은 금융 긴축에 착수했지만, 일본은행은 금융완화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지난 17일 발표한 일본의 2월 실질실효환율(Real Effective Exchange Rate)은 66.54로, 50년래 최저치였다. 일본은행이 통계를 산출하기 시작한 72년 2월(66.25) 이후 최저치다.
실질실효환율은 교역 상대국 통화가치와 물가 변화까지 고려해 산출한 화폐 가치를 말한다. 2010년을 100으로 해서 계산하며, 명목환율에 자국과 외국의 물가 수준이 반영돼 결정된다. 실질실효환율이 하락했다는 것은 대외적인 구매력이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도쿄 금융가에는 ‘망국(亡国)의 엔저’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대장성(현 재무성) 관료 출신인 노구치 유키오(野口悠紀雄) 히토츠바시대학 명예교수는 과도한 엔저를 지속한 아베노믹스 때문에 일본 경제가 망가졌다고 주장한다. 아베 신조 내각은 ‘잃어버린 20년’에서 일본 경제를 살려야 한다며 공격적인 재정 확대 중심의 ‘아베노믹스’ 정책을 펼쳤는데 그 중 하나가 ‘엔저’였다.
노구치 교수는 “엔저가 되면 자동으로 기업 이익이 늘기 때문에(일종의 마약 효과) 일본 기업들은 신기술 개발이나 비즈니스모델 전환에 소홀해질 수 밖에 없어서 기업 경쟁력을 잃었고 근로자들의 임금도 오르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일본의 실질 임금은 연 424만엔(약 4232만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22위였다. 1990년 임금과 비교하면 4.4% 오르는 데 그쳐 사실상 제자리걸음이었다.
JP모건은 “엔저로 인해 일본 소비자들의 구매력은 약화됐고 자본도피 우려는 높아졌다”면서 “엔저가 일본인들의 해외 투자를 더 자극하고, 이는 엔화 추가 약세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편, 지난 6년간 지루한 박스권에 갇혀 있던 엔화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와타나베 부인 등 외환 트레이더들은 신이 났다.
유튜브 ‘1UP투자교실’의 KEN씨는 “그 동안 외환트레이딩 시장은 변동성이 줄어 수익을 내기 어려웠고, 많은 투자자들이 주식이나 코인 시장으로 넘어갔다”면서 “최근 환 시장이 모처럼 역동성 있게 움직이자 자금이 다시 유입됐고, 1~2년치 이익을 한 달만에 벌었다는 환트레이더들이 넘쳐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개인 투자자들은 엔화 가치 하락을 전망하는 기관 투자자들과 달리, 엔화를 적극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일본 개인들의 엔화 순매수 총합계는 최근 2580억엔까지 늘었는데, 이는 역대 최고치다.
한편, 일본 언론들은 엔저가 진행되면 일본 기업의 수출이 증가해 실적이 좋아지고, 이런 기대감 때문에 주가가 오른다는 통설이 깨지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나쁜 엔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기노시타 도모오 인베스코운용 전략가는 “그 동안 일본 기업이 해외 이전을 추진하면서 공장들이 해외로 많이 나가서 엔저의 수출 증진 효과가 예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면서 “엔저가 장기 추세로 자리잡으면서 해외로 간 기업들이 번 돈을 일본으로 송금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 증권가도 엔저 트렌드가 단기적으로는 우려할 만한 단계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서예빈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일본은 에너지를 100% 수입에 의존하는데 최근 가격 상승으로 무역수지 적자 폭이 급격히 커지고 있다”면서 “엔화 약세에도 일본 경제는 당분간 부진할 것이며 일본 기업들의 마진도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관측했다.
김찬희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단기적으론 괜찮지만 만약 하반기까지 엔저가 장기화되면 업종별로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석유, 철강, 기계, 자동차 등 일본과 수출 경합도가 높거나 추가로 확대된 산업은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