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공매팀 회의자료’라는 제목의 괴문서가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물가상승), 유가와 금리 폭등, 집값 폭락, 삼성전자 거품 빠짐, 1000조 나라빚, 세금 축소’ 등 주가 하락에 베팅해야 하는 12가지 섬뜩한 이유들이 적혀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논리가 빈약한 흥밋거리”라고 일축했지만 가뜩이나 하락하는 주가 때문에 멘탈이 약해져있는 투자자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투자자 이모씨는 “실적이 증권가 예상치를 뛰어 넘을 정도로 좋게 나와도 주가는 오히려 내리기만 하니 공매도 세력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공매팀 회의 자료’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괴문서는 최근 한국 시장에서 공매도가 급증하고 있는 현상과 맞닿아 있다. 공매도란, 주가 하락을 예상해 주식을 빌려다 판 후에, 실제로 주가가 하락하면 낮은 가격에 다시 사들이고 상환해서 시세 차익을 얻는 투자법이다. 말 그대로 ‘주가가 내려간다’에 베팅하는 것이다.
1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4일 기준 유가증권 시장의 공매도 잔고는 12조3847억원으로, 지난해 5월 3일 공매도 일부 종목에 대한 공매도 재개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당시만 해도 코스피 공매도 잔고는 4조8000억원 수준이었지만, 이후 꾸준히 늘더니 작년 말 10조원을 뚫었다.
주가가 6만원대로 떨어진 대장주인 삼성전자는 특히 공매도 세력의 집중 공격 대상이다. 1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2일 삼성전자의 공매도 잔고 수량은 620만주로, 지난해 5월 초 공매도 일부 재개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공매도는 투자 주체별 비중으로 보면 외국인이 통상 70~80% 정도로 높지만, 올해 들어서는 기관들도 공매도 전쟁에 적극 참전하고 있다.
여의도 자산운용사 사장인 A씨는 “한국 증시의 상방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수익을 내려면 공매도를 할 수 밖에 없다”면서 “실적이 나오지 않으면서 기대감에 주가가 과도하게 오른 종목들, 혹은 물적분할 등으로 가치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들 위주로 공매도를 해서 수익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의 국내 증시 이탈은 공매도 세력을 더 강하게 결집시키는 요인이다. 김대준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19일 “경기 모멘텀(동력)이 둔화하고 금리가 역전되어 원·달러 환율이 높아지면(원화 약세) 외국인이 국내 시장에서 이탈한다”면서 “외국인 순매도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종목을 선택하는 것이 전술적으로 유리하다”고 말했다.
김 연구원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의 기준금리가 역전된 시기는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발표한 지난 1996년 5월 이후 총 3번이다. 김 연구원은 “현 상황과 유사한 시점은 지난 2018년 3월부터 2020년 2월 경기 모멘텀이 점점 약화되면서 금리가 역전된 시기인데, 당시 외국인이 국내 주식을 대량 순매도하면서 코스피 수익률은 점점 마이너스(-)로 변했고 미국보다 부진한 결과를 보였다”고 덧붙였다.
이미 한국 시장에서는 외국인 투자자금 이탈이 뚜렷해지고 있다. 올 들어 지난 15일까지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증권시장(코스피, 코스닥, 선물, 옵션, 파생상품)에서 순매도한 금액은 20조8580억원에 달했다. 코스피와 코스닥에서만 외국인이 내다 판 주식은 11조6818억원에 달한다. 특히 시가총액 상위주인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전자를 3조원 이상씩 팔아 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