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공매팀 회의 자료’라는 제목의 괴문서가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상승), 유가와 금리 폭등, 집값 폭락, 삼성전자 거품 빠짐, 1000조 나랏빚’ 등 주가 하락에 베팅해야 하는 12가지 이유가 적혀 있었다. 증권업계에서는 “흥밋거리”라고 일축했지만 가뜩이나 하락하는 주가 때문에 흔들리는 개미들의 불안감을 키웠다. 한 개인 투자자는 “실적이 증권가 예상치를 뛰어넘을 정도로 좋게 나와도 주가는 오히려 내리기만 하니 공매도 세력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괴문서가 증권가의 화제가 된 것은 최근 공매도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매도는 주가 하락을 예상해 주식을 빌려다 판 후에, 실제로 주가가 하락하면 낮은 가격에 다시 사들이고 주식을 상환하는 방법으로 차익을 얻는 투자법이다. ‘주가가 내려간다’에 베팅하는 것이다.
1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4일 기준 유가증권 시장의 공매도 잔액은 12조3847억원으로, 지난해 5월 3일 주요 종목에 대한 공매도가 재개된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당시 공매도 잔고는 4조8000억원 수준이었는데 7조6000억원 가량 늘어난 것이다. 대장주인 삼성전자조차 공매도 물량이 쌓이고 있다. 지난 12일 삼성전자의 공매도 잔고 수량은 620만주에 달했다. 작년 5월 이후 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실적 좋아도 공매도 공격에 하락”
14일 공매도 잔액 기준으로 1위 종목은 해운사인 HMM(6971억원)이고, 셀트리온(6463억원), LG에너지솔루션(5759억원), 두산중공업(4362억원), 삼성전자(4157억원) 등이 뒤를 이었다.
공매도는 투자 주체별로 나눠 보면 외국인 비율이 통상 80% 정도로 높지만, 올 들어서는 기관들도 공매도 전쟁에 적극 참전하고 있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한국 증시가 상승 가능성이 낮아진 상황이라 수익을 내려면 공매도를 할 수 밖에 없다”면서 “실적이 나오지 않으면서 기대감에 주가가 과도하게 오른 종목들, 혹은 물적분할 등으로 가치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들 위주로 공매도를 해서 수익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순매도 올들어 12조
외국인의 국내 증시 이탈은 공매도 세력을 더 강하게 결집시키는 요인이다. 김대준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19일 “경기 모멘텀(동력)이 둔화하고 한국과 미국 금리 차가 좁혀져 원·달러 환율이 상승(원화 약세)하면서 외국인이 국내 시장에서 이탈하고 있다”면서 “외국인 순매도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종목을 선택하는 것이 전술적으로 유리하다”고 말했다.
김 연구원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의 기준금리가 역전되는 현상은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발표한 지난 1999년 이후 총 3차례 발생했다. 김 연구원은 “현 상황과 유사한 시점은 지난 2018년 3월부터 2020년 2월 경기 모멘텀이 점점 약화되면서 금리가 역전된 시기인데, 당시 외국인이 국내 주식을 대량 순매도하면서 코스피 수익률은 점점 마이너스(-)로 변했고 미국보다 부진한 결과를 보였다”고 말했다.
올해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40년 만의 최고치 수준으로 급등한 물가상승률을 잡기 위해 통화 긴축 정책의 속도를 높이자 한국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금 이탈은 뚜렷해지고 있다. 올 들어 지난 15일까지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증권시장(코스피, 코스닥, 선물, 옵션, 파생상품)에서 순매도한 금액은 20조8580억원에 달했다. 코스피와 코스닥에서만 외국인이 내다 판 주식은 11조6818억원에 달한다. 특히 외국인은 시가총액 상위주인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전자를 3조원 넘게 팔아 치웠다.
☞키워드 : 공매도
주식을 빌려서 팔았다가 나중에 주식을 다시 사서 주식을 빌려준 곳에 갚는 투자 방식. 주가가 떨어져야 돈을 번다. 공매도는 주로 외국인과 기관이 활용한다. 개인은 빌린 주식을 90일 이내에 갚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공매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3% 정도로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