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시장인 아마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김치 가루’가 있습니다. 100그램짜리 한 통에 9달러로 지난 2020년 4월 출시했습니다. 싸지 않은 가격인데도 7개월 후 ‘칠리파우더’ 부문 1등에도 올랐습니다. 누적 판매량은 30만개로 일본 ‘시치미’, 베트남 ‘칠리파우더’ 등과 경쟁하며 출시 이후 아마존 10위권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삭한 김치를 가루로 만든다는 발상은 한국인에겐 생소함을 넘어 거북한 느낌마저 듭니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피자, 스테이크, 감자칩, 밥, 파스타 등 온갖 음식에 톡톡 뿌려 먹는다고 하네요. 이 제품을 만들어 팔고 있는 사람은 안태양(37) 푸드컬쳐랩 대표입니다.

안 대표 회사는 김치 시즈닝을 넘어 김치짜장면, 김치스낵, 김치우동, 김치말이국수, 김치바삭김 등 그야말로 김치 전문 회사로 초고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장의맛’이 전 세계 주방에 김치의 매운 맛을 수출하겠다는 안 대표를 만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안태양 대표가 자신의 오늘을 만든 제품 '김치시즈닝'을 들고 있다. 2017년 '김치시즈닝' 아이디어를 떠올린 안 대표는 3년간 식품업계 전문가를 찾아 사업을 구체화했다. /고운호 기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계획된 성공

전 세계적으로 K팝, K드라마 등 한류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안 대표의 ‘김치시즈닝’을 두고 “운이 좋았다” “K 열풍에 편승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안 대표는 김치시즈닝은 재료·용량·포장·이름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김치가루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나요?

“한국 노래와 드라마가 유행하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한국 음식, 김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김치 유산균 연구가 많아지면서 인식도 좋아졌고요. 우리나라는 집마다 김치냉장고가 있고, 1인 가구도 냉장고가 있지만 외국은 그렇지 않아요. 냉장 보관이 필수인 김치를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거죠. 그래서 상온에서 쉽게 보관할 수 있고, 언제든지 즐길 수 있는 ‘시즈닝’을 생각했어요. 2017년 연구를 시작해서 2020년 제품을 만들었어요.”

–스리라차, 시치미 등 이미 매운 양념의 대표 주자들이 있었는데, 가능성이 보였나요?

“외국인 입장에서 김치만의 특별함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유산균이었어요. 서양에서 글루텐 성분을 소화하지 못한다는 사람들 때문에 ‘글루텐 프리’ 시장이 커졌잖아요. 김치시즈닝이 그런 분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 판단했어요.”

-김치시즈닝 통에는 ‘프로바이오틱스’ ‘비건’ 글루텐프리’ ‘NON-GMO’ 표기가 되어있습니다. 젓갈을 사용하지 않고 비건용 김치가루를 만든 거네요.

“비건 시장의 성장성을 고려했어요. 2010년대 중반부터 미국, 유럽에선 비건 제품을 찾는 사람들이 확 늘어났어요. 이왕 해외 진출을 목표로 한 거, 장기적으로 이 사람들도 우리 고객으로 만들어야겠다 싶더라고요. 또 미국까지 운반하려면 유통 과정에서 상할 수도 있어서 그걸 피할 방법이기도 했어요.”

미국 아마존에서 판매되고 있는 김치시즈닝. 가격은 9달러.

–제품 크기가 좀 작던데, 이유가 있나요?

“외국 여행이나 캠핑족(族)을 공략했어요. 우리는 여행 갈 때 큰 캐리어에 고추장, 라면을 싸가지만, 외국인들은 배낭 하나만 메고 가는 경우가 많아요. 가벼운 가루형을 선호해요. 조사해보니까 비행기에 휴대할 수 있는 가루의 최대 용량이 ‘100g’이더라고요. 저희도 그 용량으로 만들었습니다.”

–제품 디자인이 독특하네요.

“마트 매대에서 2~3초 안에 고객 눈을 사로잡아야 되잖아요? 현지 고객들에게 친숙하면서 눈에 띄는 다지인을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미국 진출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디자인도 현지화했어요. 주변에서 ‘촌스럽다’ ‘돈 없어서 이렇게 만든 거냐’는 얘기까지 들었는데, 전부 의도된 겁니다. 미국 대형 마트에 가서 제품을 매대에 올려놓고, 유사 제품들과 비교해가면서 디자인을 몇 번씩 바꿨어요. ”

–시장 조사를 많이 했네요.

“스타트업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내가 원하는 제품’을 만드는 거예요. 특히 식품 사업은 모든 문제의 답이 고객들한테 있어요. 늘 ‘내가 타켓하는 고객들의 니즈’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되는데 제품을 만들다보면 본인 위주로 생각을 하는 거죠. 저희는 다행히 그게 잘 됐어요. 그래서 미국에 있는 커피숍, 타코집 등 생각치도 못한 곳들에서 우리 제품을 팔거나 쓰고 있더라고요.”

◇필리핀 야시장에서 떡볶이 장사

안 대표는 음식으로 해외에서 성공하려면 ‘맛’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 나라의 문화, 식습관을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대학생 때 필리핀에서 시작한 사업에서 그런 걸 배웠다고 합니다.

–첫 사업은 언제였나요?

“대학교 다니던 2008년 무렵, 영어를 배우고 싶은데 미국 갈 돈은 없어서 필리핀에 갔어요. 당시에 동남아에서 한류붐이 일어나 ‘슈퍼주니어’ ’포미닛’ 같은 아이돌, ‘엽기적인 그녀’와 같은 드라마가 유행했어요. TV에서 연예인을 보면서 그들이 먹는 음식에도 관심을 갖더라구요. 거기서 사업성을 본 거죠.”

–사업 아이템은 뭐였어요?

“살던 집 보증금 300만원을 털어서 야시장에서 떡볶이 장사를 시작했어요. 떡볶이가 TV에 많이 나오니까 무조건 잘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야시장은 금요일 하루만 영업하니까 쉬워 보이기도 했고요. 한국에 있는 여동생한테 연락해서 ‘일주일에 하루 장사하고 6일 동안 놀자’고 설득해서 필리핀으로 오게 했어요.”

–예상대로 잘 됐나요?

“야시장이 하루에 5000명이 드나드는 곳인데, 첫날 2인분을 팔았어요. 그날만 그런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똑같았어요.”

–잘 안 된 이유는 뭐였나요?

“공부가 부족했어요. 음식 장사는 그 나라 사회·경제·문화 모든 것을 고려해야 돼요. 필리핀에서 야시장이 발달한 이유는 미국 콜센터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새벽 3~4시에 밥을 먹으러 오기 때문이었어요. 이 사람들은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기 보다는, 익숙한 음식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싶었던 거죠.

–‘서울시스터즈’ 점포 8개를 차릴 정도로 성공했던데.

“한국에서 장사와 관련된 책 20권을 받아서 읽고, 기본부터 다시 다졌어요. 손님들 앞에서 웃는 연습을 하고, 주변 상인들과도 친해지려고 노력했어요. 한국 음식 자체가 생소한데, 파는 사람들에게서도 거리감이 느껴지면 누가 오겠나 싶더라고요. 옆 가게를 청소해주고, 상인들한테 과자를 나눠 주면서 다가갔어요. 결국 그렇게 친해진 상인들한테 영업 노하우를 배우고, 그들이 단골 손님들을 소개해주면서 손님이 많아졌어요”

-필리핀에서 잘 됐는데, 한국으로 왜 다시 돌아왔어요?

“서울시스터즈 점포도 8개나 되고, 장사도 잘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경영 노하우가 없어서 속은 앓고 있었어요. 고민하던 때에 필리핀 최대 식품 유통업체인 GNP 트레이딩에서 ‘서울시스터즈’를 운영하지 않는 조건으로 입사 제의가 왔어요. 그래서 거기서 회사 경영의 기초를 쌓고, 제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서 2017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김치시즈닝’ 개발을 시작한 거죠.”

-돌아와 학업은 계속했나요?

“대학교 2학년 때 휴학하고 필리핀에 가서 사업에 집중하다 보니까 대학을 다시 못 가겠더라고요. 서울여대 경제학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결국 졸업은 못했죠.”

안태양 대표는 '김치 시즈닝' 성공 이후 '김치짜장면' '김치우동' '김치바삭김' '김치 아몬드' 등 14개 제품을 추가로 출시했다. /고운호 기자

◇“브랜드 가치가 더 중요하다”

대부분 스타트업들은 투자를 제의 받으면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투자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홍보가 되고, 직원 수를 늘리는 등 사업을 키워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 대표의 푸드컬쳐랩은 수많은 투자 제의를 받았지만, 삼양화학그룹의 계열사인 성홍 한 곳으로부터 작년 말과 올해 초, 단 두 번의 투자를 받았습니다. 이마저도 김치시즈닝 제조를 맡은 업체가 1300평 규모의 공장을 짓는 데에 투자했습니다.

–투자를 많이 받을수록 좋지 않나요?

“사업이 잘 되고, 안 되고는 꼭 돈 때문이 아니에요. 저는 저희 제품을 좋아하는 고객이 1000명만 있으면 사업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 브랜드의 성장, 고객의 인정을 가장 중요시해요. 그런데 투자를 받으면 매출로 성과를 보여줘야 되잖아요. 그러면 당장 눈앞에 매출을 올리는데 혈안이 돼요. 브랜드 가치를 키워나가는 것보다 후속 투자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고객이 아닌 투자사를 위한 회사가 되는 거죠.”

-연 매출, 성홍으로부터 받은 투자금 규모가 궁금합니다.

“둘 다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투자사 투자액, 매출액을 공개하지 않는 것을 계약조건에 넣었습니다.”

–제품을 다른 회사에서 제조하는데, 공장을 세운다거나 회사 규모를 키울 생각은 없나요?

“당장은 없어요. 저희는 지난해에 200억원의 가치 평가를 받았는데, 현재 직원이 대표 포함해서 10명이 전부예요. 투자 받아서 공장 짓고, 제품 생산을 관리할 수 있지만 그러면 에너지가 분산돼요.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걸 하고, 나머지는 다른 업체들에 맡기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신제품 개발에 힘써서 최근 제품 라인도 15개로 늘렸어요. 편의점, 마트뿐만 아니라 CGV와 콜라보해서 ‘김치시즈닝 팝콘’을 출시 했어요. 저희는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나가는 데에 집중할 겁니다. ”